헤어산업을 탈바꿈시킨 Royal Imex 40년, 정진철 회장과 함께 한 사람들

헤어산업을 탈바꿈시킨 Royal Imex 40년
정진철 회장과 함께 한 사람들

로열아이멕스는 헤어업계에서 ‘최초’라는 수식어가 유독 많이 따라붙는다. 최초란 곧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새로운 역사를 썼다는 의미다. 신테틱 원사의 헤어 제품이 주종을 이루었던 1980년대 초반, 헤어시장에 혜성처럼 나타나 ‘휴먼헤어의 대중화’의 기틀을 제공했던 로열아이멕스가 어느덧 불혹의 나이가 되었다. 창립 후 수많은 ‘최초들’을 일궈낸 로열아이멕스의 창조와 도전정신은 정진철 회장의 따뜻한 인품, 인간 중심의 경영스타일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급성장을 거듭했고, 1990년대~2000년대에는 업계를 선도하는 전성기를 구가하기도 했다. 지난 40년 세월 동안 쉽지만은 않은 여정을 정진철 회장 곁에서 함께 했던 주변 인물들의 생생한 육성을 통해, 정회장의 삶의 궤적을 되짚어보고, 로열아이멕스가 우리 뷰티업계의 역사에서 가지는 의미를 창사 40주년을 맞이하여 재조명해본다.

“창업 후 5-6년 모진 세월 견뎠죠.”

1960년대부터 한국에서 형님과 함께 미방무역 가발업체를 운영하다, 1978년 미국으로 건너온 정진철 회장은 1980년 로열아이멕스를 창업하고 휴먼헤어 가발 사업에 뛰어들었다. 단가가 비싸지만 이윤이 많이 남는 휴먼 헤어를 뷰티서플라이의 주력 상품으로 만드는 데 초석을 다진 곳이 바로 로열아이멕스였다.

로열아이멕스를 창립한 80년대 초반에는 휴먼 헤어 보다는 신테틱 헤어 가발이 대세였다고 한다. 당시만해도 휴먼헤어는 비싸기도 했지만, 소독과 항균 처리가 잘 안되어 있다는 인식이 많아서 잘 팔리지 않은 시절이었다.

창업 후 5~6년을 모질게 버티던 중 1980년대 중반 무렵 소비자들이 신테틱 가발 대신 휴먼헤어 가발을 찾기 시작했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휴먼헤어 제품의 위생에 대한 걱정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또 소득 수준의 상승으로 소비자의 눈높이가 높아진 것도 한몫 했다. 시장의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해 휴먼헤어를 한국의 가발 공장을 통해 수입, 유통한 정 회장의 뚝심과 인내심이 마침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MICRO YAKY 없어서 못팔았어요”

휴먼헤어 열풍이 불기 시작하면서 로열아이멕스는 탄탄대로였다. 하지만 그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끝없는 연구개발로 우수 제품을 공급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기울였다.

1990년대에는 흑인 소비자의 머리결과 가장 유사한 마이크로 야끼를 개발해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실키한 헤어 제품이 다수이던 그 시절에 까칠까칠하고 풍성해 보이는 ‘마이크로 야끼’는 흑인들 사이에서는 마치 야끼의 대명사처럼 통했다.

무엇이 마이크로 야끼의 폭발적인 인기를 이끌었을까?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무엇보다 마이크로 야끼 제품 자체가 가지는 품질의 우수성이 가장 컸다. 1990년 대 중반부터 불기 시작한 마이크로 야끼의 전성기를 이끈 윤영철 전 전무이사는 마이크로 야끼 이면에 숨겨진 품질의 우수성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위빙헤어의 리프트는 두 겹으로 밖음질해서 만드는데, 마이크로 야끼는 한 겹은 강한 헤어로 또 다른 한겹은 부드러운 헤어로 만들었습니다. 부드러운 헤어와 두꺼운 헤어를 같이 넣었기 때문에 소비자 입장에서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었어요. 즉, 부드러운 것과 강한 것을 번갈아 가며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죠.”

처음에는 마이크로 야끼의 조밀한 크림프가 너무 실키하다고 거부반응도 있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내 미용사들 사이에 장점이 알려지며 본격적인 인기몰이를 하기 시작했다. 마이크로 야끼는 나중에 칼라의 구성을 150개 정도로 늘리면서 그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윤영철 전 전무이사는 마이크로 야끼의 선풍적인 인기를 회상했다.

“사람들은 마이크로 야끼의 다양한 칼라에 반하고, 부드러운 터치에 반하고, 안쪽 겹에 숨겨진 또다른 텍스처에 반했어요. 당시 세일즈맨끼리 물건을 서로 확보하려는 다툼이 벌어질 정도였습니다.”

품질이 좋은 휴먼헤어를 일반 소비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적정한 가격으로 시장에 내놓았던 전략도 적중했다.

 

Zury와 Hollywood 라인업

선발 투수는 Zury, 마무리 투수는 Hollywood!

로열아이멕스는 마이크로 야끼의 성공의 여세를 몰아, 고소득 계층을 타케팅으로 고급 휴먼헤어인 ‘Hollywood’를 출시했다. 헐리우드는 고급 휴먼헤어 시장을 석권하게 된다.

당시 로열아이멕스의 마이크로 야끼 Zury와 더불어 고급헤어 브랜드인 Hollywood는 휴먼 헤어 시장을 양분하며 산업 자체의 페러다임을 바꾸어 냈다고 평가되고 있다. 이렇듯 다양한 계층과 연령에 맞는 제품의 다양화 전략은 헤어산업이 현재와 같이 세분화된 소비자의 취향을 세밀하게 조준해서 생산, 공급하는 방식을 정착시키는 기틀을 제공했다.

실제로 헐리우드를 통해 고급 휴먼헤어의 시장이 세분화 되면서 현재 고급 휴먼 헤어의 대명사격이 된 ‘Remy’헤어 제품이 등장하게 되었다.

80년대부터 LA에서 뷰티서플라이를 운영하고 있는 OK Beauty Supply 민정근 대표는 로열아이멕스의 전설적인 역사를 생생하게 전했다.

“적정한 가격의 마이크로 야끼가 선발 등판해 초반 바람몰이를 한 후, 헐리우드라는 고급 헤어가 후반에 등판해 경기를 마무리 짓는 격이었어요. 지금 고급 휴먼 헤어의 대명사격인 Remy 헤어가 시장에 나올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어요. 로열아이멕스를 빼놓고는 헤어산업의 역사를 논할 수 없습니다.”

 

Zury와 Hollywood가 출시될 무렵 40대, 회사 쇼룸을 둘러보고 있는 정진철 회장

한편 제품의 우수성도 우수성이지만, 제품을 시장에 알리기 위한 마케팅에 대한 과감한 투자도 마이크로 야끼와 헐리우드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는데 크게 한몫 했다고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Royal Imex의 업계 최초 마케팅 사례>

1. 뉴욕 맨해튼에 대형 옥외광고판 설치
1995년 입사 후 15년 동안 영업과 R&D 업무를 담당했던 지중환 전 실장은 정진철 회장의 통 큰 마케팅 사례들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뉴욕 맨해튼에 옥외 광고를 하면 좋겠다고 회장님께 건의 드렸는데, 자세히 묻지도 않으시고 허락해 해주시던군요. 한국 헤어회사의 광고가 맨해튼 한복판의 광고판에 걸리리라고 상상도 못했던 시절이었는데 말이에요.”

뉴욕 맨해튼 나스닥 타종식에서 정진철 회장

2. 주류 흑인 헤어 잡지 백커버 광고
또 지중환 전 실장은 “흑인 헤어 전문 잡지였던 <Black Hair Magazine>의 백커버에 장기간 광고를 했던 것도 큰 화제를 불러 모았다”고 회상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흑인 주류 언론에 제품 광고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던 때인데, 회장님은 과감하게 그 고정관념을 깨뜨렸어요”

3. 대형 뷰티쇼인 헐리우드쇼 개최
2000년대에 로열 아이멕스는 LA에서 미용전문가를 꿈꾸는 미용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수천명이 참여한 대형 뷰티쇼인 ‘헐리우드쇼’를 개최한 것으로 유명했다. 각 미용학교 단위로 헤어 컨테스트에 참가하도록 했고 입상자에게는 장학금을 지급하는 행사였다.

이런 큰 행사를 어떻게 개최할 수 있었을까? 윤영철 전 전무이사는 “회장님께서 원래 장학금 후원을 자주 하시는 분이라 이런 행사 기획에 대해 흔쾌이 허락하실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4. Bronner Bros. Beauty Show 첫 참가
지금은 모든 헤어 회사들이 흑인 뷰티쇼에 나가는 것이 일반화되었지만 그것을 앞장서서 선도한 것은 로열아이멕스였다. 유명한 흑인 뷰티쇼인 <Bronner Bros. Show>에 한인 업체 중 가장 먼저 참여했다. 윤영철 전 전무이사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로열의 고문인 흑인 미용학교 교수가 애틀랜타에서 열리는 유명한 흑인 뷰티 쇼인 Bronner bros show에 나가는 것을 제안하셨어요. 쇼에 갔더니 정말 수천명의 흑인 참가자들이 참여해 대성황이었는데, 그 쇼장 전체를 통틀어 동양인은 저와 여직원 둘만 있었어요. 처음에는 우리를 신기한듯 쳐다봤지만, 이내 마이크로 야끼에 대해 큰 관심과 흥미를 보였어요.”

 

“내 나이가 몇인데 이런 시커먼 가발을 써야하나” — 컬러 150개로 늘려

로열아이멕스가 헤어업계 발전에 이바지한 것 중에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것이 바로, 1990년대까지 불과 5~6개 밖에 안됐던 헤어제품 컬러를 150여개로 다양화시킨 업적이다. 지금 헤어업계에서 공통으로 사용하고 있는 수백개의 표준화된 헤어 컬러는 바로 여기서부터 단초가 마련된 것이다.

1995년 입사해 헤어제품 칼라를 150개 이상으로 다양화하는 작업을 했던 윤영철 전 전무이사는 헤어 색상을 늘리기로 결정한 뒷이야기를 전한다.

“로열아이멕스에 입사 후 리테일에 시장조사를 갔는데 어떤 할머니가 검은 머리 가발을 사시며 그러시는 거에요.“

“내 나이가 몇인데 이렇게 시커먼 가발을 써야하나!”

“당시에 헤어 색깔은 기본 색 대여섯 가지에 불과했어요. 그때 색깔을 연령대별로 다양하게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까지 흑인 시장의 휴먼헤어제품은 소품종으로 대량생산하던 시대였다. 다양한 색깔의 제품을 만들어 시장에 내놓는 시도 자체가 대단한 모험이었다. 공장 쪽에서도 난색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로열아이멕스는 일거에 수십개의 칼라 개수를 갑자기 늘리는 속공법 보다는, 시장 반응을 살펴보며 하나 하나씩 점차적으로 칼라 개수를 늘려가는 지공법 전략을 선택했다. 내실을 다져가면서 점진적으로 시장을 확대해간 것이다.

고객의 다양한 연령대와 각양각색의 취향에 맞춰 새로운 색깔의 제품을 출시했다. 그때 마다 시장의 반응은 뜨거웠다. 고객들의 호응이 좋으니 자연히 리테일의 매출도 상승했다.

하지만 칼라가 계속적으로 확대되면서 풀어야할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소매점에 새 제품을 알려야 하는데 그때 마다 제품 카탈로그를 새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생각해낸 아이디어가 칼라 복사기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칼라의 마이크로 야끼를 착용한 모델 사진을 찍고 컬러 복사기로 카피해서 소매점에 10장 20장씩 배포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만해도 칼라복사기가 흔치 않던 시절, 한 대당 무려 5만불 정도로 매우 비쌌다.

윤 전 전무이사는 그 고가의 컬러 복사기를 구입해서 활용하겠노라고 정 회장에게 건의를 했다.

“그럼 해야지. 바로 사!”

정 회장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허락했다.

“그 무렵 정 회장님이 타시던 십년도 훨씬 더 된 아주 낡은 중고 자동차를 바꾸려고 계획하고 있었는데, 컬러 복사기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셨던 거지요.”

 

카드보드 포장의 나비효과, 헤어산업 전반에 대변혁 일으키다!

로열아이멕스가 헤어 업계의 발전에 기여한 또 하나의 선구적 업적은 헤어제품의 패키지를 고급스럽게 바꾼 점이다. 1990년대 중반까지 헤어를 누런 폴리백에 넣어 팔고 있었는데 로열아이멕스가 현재 일반화된 카드보드에 감아 넣은 포장 형태를 최초로 도입한 것이다.

“뷰티서플라이에 갔는데, 헤어가 들어 있는 누런 폴리백들이 박스 안에 먼지가 쌓인 채로 100여개가 어지럽게 담겨 있더라고요. 손님이 물건을 찾으면 박스를 정신없이 뒤적여 손님에게 건네는거에요.” – 윤영철 전 전무이사 인터뷰 中

변화에는 고통이 따르는 법, 처음에 카드보드를 넣어 포장한 제품에 대해 뷰티서플라이 소매점으로부터 큰 반발을 샀다. 가게 사이즈가 지금처럼 크지 않았기 때문에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카드보드가 들어간 헤어 제품을 진열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당시 영업 현장을 누비던 지중환 전 실장은 그때 기억이 생생하다.

“비좁은 가게에서 100개 진열할 자리에 50-60개 밖에 진열을 못하니 얼마나 불만이 많았겠어요.”

시간은 우리편이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결국 손님들이 잘 포장된 물건을 반복 구매하기 시작했다. 결국 자연스럽게 다른 회사에서도 따라하게 되었다.

카드보드를 넣은 헤어 패키지는 나비효과가 되어 헤어 산업 전체를 변화시켰다. 먼저 제품의 부피가 커짐에 따라 헤어 공장과 홀세일의 모든 창고가 커졌다. 뷰티서플라이 면적도 대형화되기 시작했다. 하물며 카드보드를 인쇄하는 인쇄소도 새롭게 호황을 누렸다. 헤어 산업뿐만 아니라 연관 산업 분야까지 동반 상승 효과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마이크로 야끼의 출시와 더불어 이렇듯 색깔의 다양화와 패키지의 고급화를 이루어 낸 2000년 대 초반 로열아이멕스는 헤어업계에서 승승장구 했다.

로열아이멕스 이영 전무이사는 “헤어업계 역사에서 흔히 휴먼헤어 시장 성장의 원동력을 3가지로 꼽는다. 첫번째가 마이크로 야끼 출시, 둘째가 레미헤어의 돌풍, 셋째가 레이스 위그 대중화이다. 소위 이 3대 성장동력의 공통점은 상품의 고급화로 객단가를 높였다는 데 있다. 이 고급 제품들이 다량 판매되면서 매출이 급격하게 증대되었다. 헤어 업계의 역사에서 휴먼헤어의 고급화와 대중화의 초석을 마련한 로열아이멕스의 위상은 클 수밖에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마음이 따뜻하신 우리 큰 형님!

이렇듯 로열아이멕스가 헤어업계를 한단계 업그레이드시킨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정진철 회장의 뛰어난 결단력과 따뜻한 인간미가 바탕이 된 것이라고 주변 인물들은 입을 모은다.

현재 정 회장을 모시고 회사 전반의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이영 전무이사는 오너의 경영철학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대기업에서나 가능한 소위 ‘권한 이양(empowerment)’을 철저하게 실천하십니다. 즉 조직별로 인사와 예산 등에 대한 자율적인 재량권을 최대한 보장하고 믿고 맡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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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 업계에는 로열아이멕스 출신의 사장이 유독 많다. 로열아이멕스의 성공 신화를 좇아 창업에 나선 이들이다. 현재 최소 15개 헤어 회사 오너가 로열아이멕스 사단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일명 ‘로얄 아카데미’ 또는 ‘헤어 업계의 사관학교’라는 별칭이 무색하지 않다. 정 회장은 퇴사 후 창업하는 직원들을 챙기는데 각별했다. 유무형의 지원도 아끼지 않는다. 후배 경영인들에게 큰 형님이라는 고백이 자연스러울 정도였다.

“퇴사 때 저희 집사람이 늦둥이를 임신한 상태였는데 출산 때까지 의료보험을 유지시켜 주셨어요. 이미 퇴사한 직원의 의료보험을 유지시켜주는 사장님들이 얼마나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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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회장 곁에는 항상 사람이 많다. 그는 사람들에게 진심을 전한다. 본디 겸손하고 선하고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있는 분이라고 그와 오래 인연을 맺은 인사들이 공통적으로 전한다.

“한때 ‘회사가 매물로 나왔다더라’는 악의적인 소문이 퍼진 적이 있어요. 그런 소문은 보통 내부나 주변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데. 그냥 허허 웃고 너그럽게 넘어가시더라구요.”

“정회장님은 큰 손님이건 작은 손님이건 문밖에 나와서 90도 허리 숙여서 인사를 하세요.”

“한마디로 마음이 따뜻하신 분입니다.”

“자신의 일에는 철두철미하지만 주변에는 관대하신 분입니다. 동종 업계 경쟁사를 위해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는 은행에 적극적으로 대출을 알선해준 일화는 유명합니다.”

자유스럽고 편안한 분위기의 직원 간담회

 

정회장은 경제적으로 성공했지만, 서민적이고 소탈하고 직원들과도 격의를 두지 않는다고 한다.

“점심시간 사무실에서 직접 라면을 끓여 드시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특별한 외부 약속이 없으면 직원식당에서 직원들과 마주 앉아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즐겨하십니다.”

정 회장은 넓은 인맥으로 유명하다. 사람을 관리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그가 억지로 꾸미는 것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해준다고 입을 모은다.

“저희 아들 둘을 딱 한 번 봤는데도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시고 안부를 물으십니다. 머리가 좋다고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죠. 아들 결혼식 때도 직접 손편지를 써서 축하를 해주였어요.” — 박형윤 대표(시카고 Touch of Beauty Supply)

“이번 조지 플로이드 사망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을 때, 우리 가게도 약탈을 당했는데, 직접 손으로 쓴 위로의 편지를 보내주셨어요. 손 편지를 쓴다는 게 요즘 같은 시절에 흔치 않죠.” — 이영재 대표(펜실베니아 Hair Town Beauty Supply)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때 휴스턴과 댈러스에 지역에 피신해온 수재민들을 돕기 위해 당시 10여개 뷰티 도매회사에 지원을 요청하였었습니다. 그때 로열아이멕스가 가장 많은 인력과 물자를 보내주셨어요. 그 밖에도 저희는 연말이나 할리데이 때 마다 흑인 커뮤니티에 후원 행사를 하는데 그때마다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고 계십니다.” Jenny Suh 대표(댈러스 Jenny Beauty Supply)

정 회장은 진정한 경영인이자 존경받는 선배이면서 헤어산업사의 새로운 장을 연 선각자다.

 

세계한인무역협회(World-OKTA)와 세계한상대회를 이끌다!

정 회장 인생의 족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이 있다. 바로 세계한인무역협회 회장으로서 월드옥타의 위상을 한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것과 세계한상대회를 창립한 공로가 그것이다.

현재 미국 동남부 한인무역협회장과 월드옥타 애틀랜타 지회장을 맡고 있는 Beauty Master 박형권 대표는 “2000년 월드옥타 11대 회장으로 정 회장님이 취임하고 한국 정부로부터 5억원의 지원금을 최초로 받아 냈다”고 전하며, “당시 유명무실했던 월드옥타의 위상을 명실상부하게 만든 계기를 마련한 장본인이 바로 정 회장”이라고 전했다.

또 정회장은 2000년 월드옥타 회장을 맡은 시절, 세계한인 경제인들의 글로벌 네트워크인 ‘세계한상대회’를 추진했다.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마침내 2002년 서울에서 전세계 동포 968명이 모인 제1회 세계한상대회를 성사시킨 업적도 큰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그 후 세계한상대회는 매년 개최가 되고 2020년 현재 19차 대회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전세계에서 약4,000여명이 참여하고 있다. 정 회장은 세계한상대회 1대와 5대 회장을 역임했다. 박형권 대표는 “정 회장님의 따뜻한 인품과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세계한인무역회와 세계한상대회에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 있게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2008년 ‘자랑스러운 한국인대상’ 수상식 기념 연설 중인 정진철 회장

내일이 더 기대된다!

로열아이멕스는 업계를 선도하는 사명감으로 시장의 흐름에 순응하기보다는 독창적인 제품으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하지만 독창성을 너무 추구해서 일까. 2010년대에 들어와 “급변하는 시장 트렌드와 치열한 가격출혈경쟁을 펼치는 시장 상황 속에서 다소 성장이 정체되는 모습을 보였다”고 일각에서는 평가한다.

하지만, ”최근 3-4년 전부터는 트렌드에 맞게 다양한 스타일을 출시하고 가격경쟁력이 있는 제품을 발빠르게 내놓으면 서서히 옛 영광을 회복하고 있다”고 뷰티서플라이 업계는 진단한다. 댈러스의 대형 뷰티서플라이 Jenny Beauty의 데이비드김 실장은 “최근에 Zury에서 나온 어깨정도 길이의 Fashion Twist 제품이 잘 나간다”고 전하면서 “마케팅과 제품개발 부분에서 시장 상황을 잘 반영하기 위해 많이 노력하고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그리고 “고객들 사이에 Hollywood나 Zury에 대한 인지도가 여전히 높기 때문에, 이런 추세로 계속 노력하다 보면 로열아이멕스의 앞날은 밝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전했다. 그의 말마따나 정 회장의 인품을 존경하는 많은 이들이 로열아이멕스의 살아있는 역사, 영광된 전설의 화려한 귀환을 염원하고 있다.

다시 비상하는 로열아이멕스의 제품 라인

 

 

Royal Imex 창립 40주년 기념 특집 BY SAMUEL BEOM
BNB 매거진 2020년 9월호 ©bnbma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