욜란다, 블라지아 그리고 은선씨

욜란다, 블라지아 그리고 은선씨

뷰티션이자 가수그녀의 인생 2

거리의 패셔니스타를 찾기 위해 나섰던 지난달, 패션은 물론 이국적인 외모로 낯선 이에게도 밝게 웃어주는 이를 만났다. 다소어색한 한국말이었지만 그녀의 눈빛과 태도에서 익숙한 한국인의 느낌이 물씬 났다. “혹시..” 하고 물으니 그녀는 “어머니가 한국 사람이에요”라고 답했다. 그녀의 이름은 욜란다, 한국 이름은 은선 씨다.

모델 포스를 물씬 풍긴 그녀는 블라지아, blazia(black+asia)라는 예명으로 활동하고 있는 가수다. 아직 유명세를 치르지는 못했지만 직접 만든 노래와 뮤비는 그녀의 열정으로 프로페셔널한 느낌을 줬다.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그녀는 조금은 늦은 나이에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용감히 가수의 길로 뛰어들었다. 이전까지 그녀는 하와이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던 어머니의 감각을물려 받아 뷰티션으로 15년간 일해왔고 현재도 이 일을 놓지 않고 이어 나가고 있다.

블라지아의 데뷔곡 ‘Pushing My love’ 뮤비 속 욜란다

그녀의 이야기가 더 듣고 싶었다. 왠지 흥미로운 인생사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3시간여의 인터뷰 동안 잠시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때로는 위대한 사람들의 엄청난 이야기보다 평범한 삶이 감동을 주곤 한다.

욜란다는 한국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4살 때까지 인천에서 살았다. 욜란다는 “그때는 한국말을 잘했어요, 물론 4살 수준이었지만요” 하고 웃었다. 가족들이 다 같이 침대가 아닌 바닥에서 이불을 덮고 잔 기억도 떠올렸다. “아득한 일이긴 하지만 한국에서지냈던 시간들이 문득 떠오를 때가 있어요.” 한국에서의 기억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공존한다고 말했다. 나쁜 기억은 대부분 그녀를 “깜둥이”라고 놀린 이들 때문이었다. 눈에 띄는 혼혈 외모가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그렇게 환영받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좋은 것이 더 많았다며 욜란다는 웃어 보였다.

4살, 욜란다는 하와이로 이주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미용실을 열고 밤낮없이 생계를 위해 일했다. 그녀는 “우리 부모님은 어떤범죄나 인종차별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어요. 먹고사는 문제가 우선이었으니까…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저는책임감을 가지고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성인으로 자라날 수 있었죠”라고 말했다. 하와이로 이주한 후 그녀의 생활은 당시 여느한인 이민 가정과 다르지 않았다. 문화적 충돌을 느꼈고 생업을 위해 늘 분주한 부모님을 대신해 혼자 많은 일들을 해결해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 후 취득한 헤어 자격증을 기반으로 미용업을 시작했다. 헤어컷, 염색, 케미컬 등을 다루는 게 재미있었고 인정도 받았다. 욜란다는 지금 하고 있는 레드, 옐로, 그린 등 여러 톤의 하이라이트 컬러의 염색도 직접 한 거라며 머리카락을 들어보인다.

멀리서도 눈에 확 띄는 헤어 컬러. 15년 뷰티션 경력의 욜란다는 직접 스타일링을 했다

뷰티서플라이도 자주 찾는다. “뷰티서플라이는 저렴하면서도 다양한 제품들을 한 번에 만날 수 있는 곳이에요. 가끔 매장을 찾으면서 위빙 헤어나 까다로운 케미컬 제품을 다뤄주는 숍이 매장 내에 혹은 옆에 같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해요” 그녀는중고숍의 단골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손을 떠난 물건들이 자신의 센스로 되살아날 때 희열을 느낀다고 했다.

그녀는 “저는 뷰티션이라 스스로의 외모를 가꾸고 누군가를 화려하게 꾸며주는 일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감과 내면의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해요. 유럽 스탠더드, 흰 피부와 금발 머리 등만 아름답다고 생각해 그 기준을 쫓아가려고 하는 이들을 보면안타까워요.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스타일링, 그리고 그것을 빛나게 해주는 자신에 대한 믿음과 존중. 그런 것들이 꼭 필요해요.저는 저를 사랑하고 아껴요. 그리고 제 주위의 가족들도, 제 고객들도 그렇게 생각하기를 바라고 있어요” 라고 말했다.

그녀의 자기애, 높은 자존감에는 이유가 있다. 차곡차곡 성실하게 살아오며 자신에 대한 신뢰를 굳혔기 때문이다. 26살, 조지아주로 와서 새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가지게 되면서 욜란다는 자신을 다시 돌아봤다. 그래서 뒤늦게 대학에 입학했고 34살에 석사학위까지 마쳤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GED로 고등학교 졸업 학위를 받은 그녀의 반전 스토리였다. “하와이에서 미시시피로 이주해서 고등학교를 다녔어요. 하와이와 본토는 또 다른 분위기였고, 저는 적응하지 못했죠. 그렇지만 다시 공부를 시작하니 재밌었어요. 헤어숍을 운영하는 것에 석사 기간 동안 배운 마케팅은 큰 도움이 됐어요” 육아와 병행하는 어려움 속에서꿋꿋하게 학위를 마치고 비즈니스와도 연계하며 그녀는 스스로를 믿게 됐다.

그사이 욜란다의 어머니는 한식당을 차렸고 한인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의 어머니는 조지아주 예수사랑나눔선교회(예사나) 한정숙 대표다. 한 대표는 추운 겨울 길을 잃고 헤매는 홈리스들을 위해 따뜻한 밥을 준비하고 생활용품을 챙겨 거리로 나섰다. 한국전에 참전했던 미군 용사들을 찾아 공로패를 전달하기도 했다. 지난해 16년간의 공적을 인정받아한대표는 제15회 세계 한인의 날에 외교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한정숙 예사나 대표의 수상이 있던 날. 욜란다는 엄마가 받은 메달을 걸고 기념촬영을 했다.

“가끔은 가정보다 봉사활동에만 더 열심인 엄마가 이해가 가지 않을 때도 있었어요. 당장 우리가 어려워도 엄마는 남을 돕는 일에 더 집중했거든요” 욜란다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본인 역시 힘든 이웃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엄마가 물려준 DNA 때문일까, 그녀는 지금 “We are the world”와 같은 세계 평화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노래를 만들고 있다. 바쁜 일정 중에서도엄마가 운영하는 예사나의 봉사활동도 미루지 않고 참여하고 있다. 애틀랜타에서 스파 총격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아시아 증오범죄를 멈춰달라는 메시지를 자신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밝히기도 했다.

또래보다 어려 보인다는 말에 욜란다는 “늘 젊은 마인드를 가지려 노력하니까요”라고 답했다. 여전히 꿈을 꾸고, 새로운 것들에설레어 하며 내재되어 있는 잠재력을 깨우는 것을 시도하는 그녀였다. 다소 늦게 가수라는 꿈에 도전한 것도 그런 열정 때문이었다. “시도해 보지 않으면 후회할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논리적으로 생각했다면 하지 못할 일이었죠. 노래를 부르고 그것을 대중에 알리는 작업을 하면서 오랫동안 시달렸던 환영에서도 벗어났어요. 좋아하는 일을 해야 되는 이유겠죠?” 라고 그녀는 말했다.

“슈퍼스타가 되고 싶은 건 아니에요. 좋아하는 일을 하고 그걸 즐기면 그뿐이죠. 무언가 노래로써 화합을 이뤄낼 수 있다면 좋겠어요. 선을 하나씩 그리다 보면 언젠가는 마스터피스를 만들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제 노래로 커뮤니티의 연대를 만들고 약물 중독자들과 같이 세상을 등지려 하는 이들에게 힐링을 선사하고 싶어요. 그게 꿈이에요”

뷰티션이자 가수, 인생 2막을 맞이한 욜란다, 은선씨의 꿈을 응원해주세요!

뷰티션 인터뷰 BY Jeehye Ra
BNB 매거진 2022년 3월호 ©bnbma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