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상사 김병철 사장–09. 재 속에서 다시 피어난 니나의 꿈
지난 이야기
[1983년, 미성상사의 아프리카 진출 계획에 따라 세네갈로 파견된 김병철 사장은 헤어 브랜드 ‘NINA’를 현지에서 성공적으로 안착시키며 10년간 근무했다. 한국 본사로 복귀할 줄 알았지만, 1993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공장 총괄로 부임하면서 또 한 번 새로운 도전이 시작됐다. 그는 공장 환경을 개선하고 디자인·생산·마케팅의 전 과정을 정비해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강화하는 한편, 늘어난 주문량에 대응하기 위해 주야 2부제 근무체계를 도입하고, 직원들의 사기 진작 방안도 마련하며 조직의 변화를 이끌어나갔다.]
수도에서 지방으로
지난 호에 물난리 후 지방에도 공장을 신설하여 1, 2, 3공장을 순회하며 근무했다는 내용을 잠깐 언급했다. 그런데 수카부미같은 지방으로 공장을 옮기게 된 데는 생산 시설 확장 외에도 사실 다른 이유가 또 있었다. 그것은 바로 ‘노임’, 즉 인건비 문제였다. 그 즈음 인도네시아에 새로운 노동법이 생겼는데, 매년 지방(주) 정부와 노조, 기업이 모여 각 지역의 최저임금을 결정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이 법안은 노동력이 많이 필요한 기업을 지방으로 이전시키려는 정부 정책 중 하나로, 수도권의 주택난이나 교통 체증을 완화할 겸, 도시 인구를 분산시키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 법이 적용되면서 대도시와 지방의 임금 격차는 해마다 벌어져, 많게는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나게 되었다.
미성은 인도네시아 첫 공장을 수도이자 최대 도시인 자카르타에 있는 수출 공단(KBN: 까베엔)에 세웠다. 항구도 가깝고 종업원을 구하기도 쉬우리라는 판단을 해서였다. 그러나 가발 사업은 인건비가 제조 원가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 제품은 인건비가 싼 지방 공장들과 경쟁하는 것이 도무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지방 이전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수카부미 지역에 땅을 구매하고 약 1년에 걸쳐 새 공장을 짓고 인건비 부담이 큰 가발 공장부터 옮겨 가동을 시작했다. 한편 브레이드(Braid) 생산은 KBN 공단에 남았다. 브레이드는 가발만큼의 인건비가 들지 않기도 했고, 물류비를 생각하면 항구 옆이 나았기 때문이었다.

수카부미 공장 공사 현장.
화마가 덮치다
그러던 2018년 3월 31일, 끔찍한 일이 터졌다. 자카르타 KBN 공장에 불이 난 것이다. 원인은 경비실 뒤편 콘센트 누전으로, 경비원들이 취사를 하기 위해 종종 사용하던 장소였다.
그날은 마침 부활절 휴일이라 공장이 텅 비어 있었다. 인명 피해가 없던 것은 천만다행이었지만, 그 바람에 화재 발견이 너무 늦었다.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공장 전체가 완전히 전소되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자카르타 사무실은 물론, 브레이드 생산 설비가 모조리 타버렸다.
더 큰 문제는 원부자재 창고까지 함께 불탔다는 점이다. 수입 통관이 편하다는 이유로 KBN 수출 공단에 창고를 두었는데, 그곳에 쌓아 두었던, 무려 2개월 치가 넘는 원사와 부자재가 전부 잿더미로 변했다.
건물 2동이 꼬박 이틀간 불탔다. 소방차만 7대가 출동했으니, 그 해의 큰 화재로 기록될 만했다. 수해에 이어 화재까지, 참으로 다사다난 했다. 이 화재로 결국 수카부미 공장으로의 완전한 이전이 결정되었다.
영상 기록에서 캡쳐한 화재 후 공장의 모습.
미성의 새 시대, ‘니나(NINA)’와 ‘따만히자우‘
새 지역에서 새로 시작하자는 의견을 모아 공장 전체를 옮기면서 이름도 변경했다. ‘미성 인도네시아’ 대신, ‘니나 비너스 인도누사(NINA VENUS INDONUSA)’로 간판을 바꿨다. ‘니나’는 아프리카에서 미성이 크게 키워냈던 상표 이름이었다. 그렇게 2018년부터 ‘니나’의 시대가 열렸다.
새로 터를 잡은 수카부미 공장 부지는 3헥타르(약 9천 평)에 달하는 언덕배기 땅으로, 직접 땅을 골라 흙을 깎고 다져 평평하게 만들고 담을 쌓았다. 굳이 평지가 아닌 비탈진 나대지에 자리를 잡은 까닭은 내심 아프리카 근무 시절부터 품어온 계획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장을 공원처럼 만들고 싶다.’
나는 기회가 닿는다면 종업원들이 집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인 공장을 가능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장소로 꾸미고 싶다는 생각을 줄곧 해왔다. 마침 이 지형은 생각만 해왔던 꿈을 실현하기에 딱 좋은 자리였다.
공장 건물이 들어선 자리를 빼고 남은 언덕에 ‘따만 히자우(Taman Hijau)’, 우리말로 ‘녹색 공원’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진짜 공원처럼 공들여 꾸몄다. 아래에는 오토바이 주차장을 넉넉하게 만들고, 언덕 오르막길 정원 사이로 ‘꽃길’을 냈다. 다른 쪽에는 폐수 정수장도 만들고 작은 연못을 마련하여 악어와 거북이를 함께 사육하는 별난 생태계도 만들었다. 종업원들이 출근하는 길이 싱그러운 산책길처럼 느껴지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따만 히자우 출입문 전경

따만 히자우 연못의 악어와 거북.

따만 히자우 꽃길.

본 공장 앞 잔디 정원.
우리의 심장, ‘바투 메라‘
일하는 방식도 새롭게 다듬었다. 일본의 토요타 공장에서 실시했다던 ‘5S 운동’을 도입했다. 5S란 ‘정리(Organization)’, ‘정돈(Tidiness)’, ‘청소(Cleaning)’, ‘청결(Cleanliness)’, ‘습관화(Discipline)’의 다섯 가지 요소를 말한다.
제품을 직접 만드는 종업원들에게 “깨끗한 환경에서 좋은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야말로 어떤 환경 개선보다 의미가 컸다. 처음에는 “청소는 청소부의 일인데 왜 내가 해야 하느냐”며 툴툴대던 직원들이었지만, 꾸준히 반복하여 교육한 결과 공장 환경도 눈에 띄게 깨끗해지고 생산 품질도 올라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능률제 급여 제도’ 역시 큰 변화였다. 기술이 뛰어난 종업원에게는 ‘하이테크(High-Tech)’라는 특별한 명찰을 가슴에 달아주었다. 이 사람은 기본급을 뛰어넘는 금액을 받는 대상이라는, 즉 실력으로 인정받는 종업원이라는 증표였다. 명찰은 받은 종업원들은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고 일에 더욱 자부심을 가지곤 했다. 기본급에 더해 생산량만큼 성과급을 받아갈 수 있게 되니, 도시와의 임금 격차도 다소 극복할 수 있는 장점이 되어 종업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은 제도가 되었다.

우수기능자(High-Tech) 선정을 알리는 포스터.
이렇게 근무 태도와 더불어 공장 환경이 좋아지자, 니나 공장은 정부나 산업 시찰단의 단골 방문 코스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에 인도네시아로 취재를 올 때에도 꼭 한번씩 들를만큼 명소가 되어갔다.
공장의 입구 잔디 위에는 ‘바투 메라(Batu Merah)’ 라는 표지석이 하나 있었다. 인도네시아 어로 ‘바투(Batu)’는 바위, ‘메라(Merah)’는 붉은색을 뜻하니, 이름 그대로 ‘붉은 바위’였다.
이 바위는 공장을 세울 당시, 근처 채석장에서 발견하여 포크레인으로 옮겨 온 것으로, 학명으로는 ‘레드 자스퍼(Red Jasper)’의 일종이라고 불리는 돌이었다. 어찌나 묘하게 생겼던지, 꼭 사람의 심장 모양을 닮았다. 그래서 ‘심장 돌’이라는 의미로 ‘하트 록(Heart Rock)’이라고도 불리기도 했다.
‘바투 메라’는 니나의 모든 종업원이 하나로 단합한다는 ‘모두의 심장’을 상징하는 의미로 놓였지만, 공장이 유명해지고 여러 곳에서 방문객이 찾아오면서 모두가 꼭 이 바위 앞에서 사진을 찍는 등 랜드마크로 인기를 얻었다. 그렇게 ‘바투 메라’ 역시 명실상부한 니나 공장의 얼굴이 되었다.

바투 메라 옆에서 포즈를 취한 김병철 사장.
모두가 함께 만든 ‘올해의 표어‘
그 즈음, 공장에 자리잡은 중요한 연례행사 중 하나는, 매년 한 해의 목표를 담은 ‘표어’를 정해 공장 곳곳에 붙이는 것이었다. 그 해의 큰 주제가 정해지면, 직원들은 머리를 맞대고 문구를 직접 만들어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다같이 무기명 투표를 하여 ‘올해의 표어’를 뽑았다. 표어로 선정된 문구를 만든 직원에게는 두둑한 축하금 포상도 주어졌다.
모두가 함께 뽑은 표어는 인도네시아어뿐만 아니라 영어, 불어, 한글 등 다양한 언어로 인쇄하여 인도네시아 공장은 물론 아프리카 공장과 본사에까지 똑같이 걸어두었다. 모두가 같은 목표를 보며 한마음으로 나아간다는 뜻깊은 상징이었다. 그렇게 ‘붉은 심장’ 니나 공장의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열심히 돌아가는 니나 공장의 전경.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