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상사 김병철 사장–08.
성장하는 공장, 확장하는 꿈

수카부미 신축 공장 작업장에서의 김병철 사장.
지난 이야기
[1983년, 미성상사의 아프리카 진출 계획에 따라 세네갈로 파견된 김병철 사장은 맨땅에 공장을 세우는 일부터 시작해, ‘NINA’ 헤어 브랜드를 성공시키기까지 많은 난관을 겪는다. 당초 1년 예정이던 파견 근무는 10년에 이르렀고 그가 한국 본사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생각할 때 쯤, 회사는 그에게 인도네시아 공장을 총괄해달라는 제안을 한다. 1993년, 가발 품질을 한 단계 끌어올리겠다는 포부를 안고 자카르타에 도착한 김병철 사장은 새로운 도전을 마주한다.]
녹색 공장의 꿈
회사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면서, 나는 슬슬 공장의 외관 관리를 해야겠다 마음 먹었다. 우리 공장을 방문하는 고객들에게 삭막한 회색 시멘트 공장보다는, 따뜻하고 믿음직한 분위기를 풍기는 공장을 보여주고 싶었다. 솔직히 말하면, 직원들에게도 “우리 공장이 다른 공장보다 훨씬 멋지다”는 자부심을 안겨주고자 했다.
첫 작업은 페인트칠이었다. 색깔은 편안함과 희망의 그린 컬러. 실제로 작업장 안은 한 층 밝고 차분해졌고, 눈도 덜 피로해졌다. 건물 주변에는 잎이 넓고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들을 심었다. 인도네시아 토양과 찰떡궁합인 야자 나무, 팜 나무가 줄지어 들어섰고, 아프리카 시절부터 좋아했던 ‘불꽃나무’ 로얄 포인시아나도 몇 그루 귀하게 식목했다.
몇 년이 지나자 삭막했던 공장 주변은 어느새 작은 열대우림 속 리조트처럼 변했다. 우리가 입주해 있던 KBN 공단의 공단청에서도 이 변화를 좋게 보았는지, 미성 공장을 수차례 ‘조경 관리 최우수업체’로 선정하여 표창해 주었다. 상당히 뿌듯한 경험이었다.

녹화작업은 공장의 인상을 변화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디자인 개발·생산·마케팅, 성장의 삼박자
공장 환경을 개선하는 동시에 제품 차별화도 시도하기 시작했다. 원자재 화이버로 미성의 특색을 나타내기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눈을 돌린 것은 부자재 캡, 그중에서도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는 망, 네트(Net)였다. 망 안쪽에는 보통 꽃무늬 자수가 있어서 꽃망이라고 불렀는데, 우리는 과감히 기존의 꽃무늬 대신 그 자리에 미성 로고를 넣기로 했다.
그런데 ‘미성 로고’ 망은 미성 제품에만 사용해야 하다 보니 일반적인 주문량이 아닌 많은 양을 한꺼번에 주문해야 했다. 다소 부담스러웠지만 인연이 있던 한국의 한 공장과 함께 샘플 디자인부터 제작까지 과감하게 진행했다. 물론 도입 초기에는 새로운 망 디자인을 낯설어 하는 바이어들도 있었다.
“굳이 색다른 모양을…? 기존에 쓰던 망을 써 주시면 안됩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차별화 전략의 취지를 설득하려 애썼다. 몇 년이 지나자 미성 로고 망은 품질 보증서처럼 여겨지게 되었고, 이를 모방하려는 공장들까지 생겨났다. 미성의 제품이 그만큼 인정을 받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후에도 밴드 등 다양한 부위에 로고 디자인을 적용하며 차별화를 이어갔다.
이런 흐름 속에서 2000년경에는 ‘서경인쇄’를 인수해 포장재를 직접 제작하고, 디자인·그래픽 파트를 운영하여 바이어와의 협업 뿐 아니라 홍보물, 팸플릿, 달력까지 공급했다. 비슷한 시기에 설립한 ‘일진관’은 가발 개발실과 쇼룸, 교육실을 갖춘 공간으로, 미국 출장 시에는 가발 개발실의 인력을 동행시켜 바이어와 리테일 요구를 세세히 기록하고 신제품 개발에 틈틈이 반영했다.
이렇게 디자인과 개발, 마케팅의 박자가 맞아 떨어져 굴러가게 되자, 안정되어가고 있던 공장은 6~7년만에 크게 활성화 단계에 오르게 되었다. 이제는 미성 제품이라면 미국 시장에서도 호평과 인정을 받았고, 신규 바이어들의 구매 문의가 많아졌다.

일진관 오픈을 함께 축하하는 모습 (사훈인 성실·일진 중에서).
수요를 맞춰라
한편, 가발 업계에는 특수한 현상이 하나 있었다. 부활절, 추수감사절, 방학 시즌, 크리스마스 시즌의 연 4회 수요기와, 그 외의 비수요기로 시즌이 뚜렷이 나뉜다는 점이었다. 수요기에는 물건이 없어 납기를 맞추기 힘들었다. 반대로 비수요기에는 공장 가동이 어려울 정도로 주문이 줄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공장에 주야간 2부제를 도입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주야로 풀 가동하려면 숙련된 종업원이 다수 필요하기 때문에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안되는 이유는 그만 따지고 일단 실행을 해보자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이면서, 협조적이지 않은 종업원을 일일이 만나 교육하기도 하고 부탁하기도 하는 등의 노력이 이어졌다.
가장 어려운 일은 자기 기계를 남이 만지는 것을 싫어하는 미싱 기능공들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마치 테니스 선수가 자기 라켓을 남 쓰라고 주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우려를 덜어주기 위해, 미싱 기계의 고장 시에는 새 기계로 대체하도록 준비해주고, 생산성이 떨어지면 그만큼 회사에서 보상하겠다고 달랬다.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2부제는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야간 작업 생산성은 주간에 비해 저조했지만, 전체적인 생산량과 납기율이 크게 올라 고객의 요청을 맞출 수 있게 되면서, 결국은 전체 공장을 1, 2부로 나누어 운영하게 되었다.
사장님은 불면증이래
공장이 밤낮으로 돌아가니, 늦은 밤이라도 직원들에게 책임자로서 얼굴이라도 보여주는 것이 직함에 따르는 의무라고 생각했다. 정규 근무 시간을 마치고 퇴근을 하면 집에서 잠깐 잠을 자다가 깨어 그대로 옷을 주워 입고 다시 공장으로 돌아갔다. 밤에 공단에 들어서면 몇몇 공장만 불이 켜져 훤했는데 그 광경이 그렇게 뿌듯할 수 없었다.
작업장을 돌면서 야간 근무를 하는 종업원들에게 윙크로 인사를 하다 보면 이들을 위해 나도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한 공장에 2천 명 가까이 종업원이 있으니 4천 개의 눈망울이 나를 주시한다는 생각에 강한 책임감을 가지게 되었다.
얼마 후에 재미있는 소문이 돌았다. “우리 사장님은 불면증이래. 밤에 잠이 없어서 회사에 나온다고 하더라.” 사실 나는 머리만 닿으면 잠을 잘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 소문이 싫지만은 않았고, 지금 생각을 해보니 재미있게만 느껴진다.
사장님, 연장 야유회는 안 되나요?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 격려차 야유회도 다녀왔다. 대형 관광버스를 빌려 2천명이 넘는 종업원들을 부서별로 나누어 태우고 2시간 거리 해변가로 놀러 갔다. 40여대의 관광버스가 경찰 오토바이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이동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현지 연예인도 초청하고, 노래자랑에 게임도 즐기고 시상식도 했다. 직원들은 아주 즐거워하는 눈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종업원들이 집과 공장을 왔다갔다하는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먼 바닷가에 놀러간다는 것을 평소 생각도 못 했던 일이라고 했다. 다들 돌아갈 시간이 되었는데도 도무지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사장님, 공장에서 물건 바쁘다고 연장 작업도 시키는데, 야유회 와서 연장 야유회는 안 됩니까?
아쉬움이야 이해하지만 40대의 관광버스를 야간에 운행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닐 것이 분명했다. 그들을 달래고 달래서 다음에도 야유회를 또 하자고 약속하고 돌아왔다.

야유회를 신나게 즐기는 공장 종업원들.
수해, 그리고 공장의 확장
2007년 2월에는 기록적인 홍수가 나서 공단 전체가 성인 허리 깊이까지 잠겼다. 공단 자체가 해안가 저지대에 위치했기 때문에 비가 많이 오면 물이 잘 빠지지 않는 장소였다. 차량은 이미 통제를 하고 있었고, 사람이 들어가려면 드럼통 위에 널판지를 얹어 급조한 뗏목같은 것을 타야 했다.
원자재, 부자재, 제품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물에 잠겼다. 미싱 기계 등 조금 높은 곳에 있던 물건들은 간신히 건질 수 있었다. 천재지변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공장이 수해를 입었다는 소식을 들은 미국의 바이어들이 위로금을 보내거나 납기일을 미뤄주는 등 배려를 해 주어 따스한 인간미를 느낄 수 있기도 했다.
수해 후에는 공장을 확장하자는 결정을 내렸다. 같은 공단 내의 다른 공장에 가발 생산 시설을 확충하고 종업원을 충당하여 제 2 공장으로 운영하고, 지방인 수카부미 지역에도 제 3공장을 신설했다. 이렇게 해서 가발 제 1, 2, 3공장을 순회하면서 근무하는 시기가 오게 되었다.

홍수로 물에 잠긴 KBN 공단.

침수된 공장에 들어가기 위해 큰 대야에 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