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상사 김병철 사장–07.
인도네시아, 새로운 도전의 시작
BNB 매거진은 6회까지 연재되었던 미성상사 김병철 사장의 회고록을 이번 호부터 다시 독자들께 선보인다. 김병철 사장의 생생한 구술을 바탕으로 아프리카와 인도네시아를 넘나드는 ‘그 시절 가발 산업’ 이야기를 들어본다.
지난 이야기
[1967년 삼천리 연탄 주식회사에 입사한 김병철 사장은, 입사 5년만인 1972년, 삼천리 그룹이 가발 회사인 미성상사를 인수하면서 하루아침에 가발 회사로 발령받게 된다. 가발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던 그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가발 사업을 하나씩 배워나간다. 이후 1983년에는, 미성상사의 아프리카 진출 계획에 따라 세네갈로 파견되어 그야말로 맨땅에 공장을 세우는 일부터 시작해, 마침내 ‘NINA’ 헤어 브랜드를 성공시키게 된다. 당초1년 예상했던 아프리카 파견은 무려 10년에 이르게 되었는데…]
새 출발점
세네갈의 따가운 햇살 아래서 10년째 땀을 흘리고 있던 1992년 말의 어느 날, 본사에서 급하게 호출이 왔다. 그 즈음의 나는 ‘이제 슬슬 한국으로 돌아갈 때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회사가 준비한 것은 또 다른 모험이었다.
서울에 도착해 보니 미성상사에서는 새 대표가 취임하는 등 대대적인 직제 개편이라는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해외사업 총괄 부사장’이라는 거창한 직함과 함께 폭탄 같은 소식이 떨어졌다.
“김 부사장, 인도네시아 현지 사장으로 부임하여 공장을 정착시켜 주십시오.”
1993년 1월 1일부로 인도네시아행. 너무 갑작스러운 발령이었다. 마침 아프리카에서는 미성 세네갈 법인 창립 10주년 행사가 계획되어 있었는데, 여기에 내 발령까지 겹치면서 두 달 간격으로 10주년 기념 행사와 송별회를 연달아 치뤄야 했다. 또 다른 낯선 땅에서의 삶이 급작스레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운명적 만남
그 시절엔 아프리카에서 인도네시아로 가려면, 세네갈 수도 다카르에서 출발하여 뉴욕→서울→자카르타라는 복잡한 루트를 거쳐야 했다. 하지만 이 여정 속에서도 운명적 만남이 있었다. 뉴욕에서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미국에서 헤어 사업을 하시는 한 회사의 회장님을 만난 것이다. 업계에는 이미 미성의 사장이 바뀌고 아프리카의 김병철이 인도네시아 해외사업 총괄을 맡는다는 이야기가 꽤 퍼졌는지, 회장님은 나를 꼬박꼬박 ‘김 사장’으로 호칭했다. 우리가 장시간 비행에서 나눈 대화는 인도네시아에서의 첫 목표를 세우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김 사장, 인도네시아 공장은 아직 품질에 대해서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 사장이 가거든 가발 품질 향상에 주력해 주십시오.”
인도네시아에서 해야 할 일의 첫 방향이 그렇게 결정되었다.
첫 발을 내딛다
인도네시아에 도착하자마자 우선 현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전임자들이 1년간 운영해온 공장을 섣불리 뒤집을 수는 없었고, 먼저 이해하고 행동하는 것이 순서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 현지 관리자들, 특히 한국에서 온 여성 반장들(인도네시아 공장을 세울 때 현장 관리를 쉽게 하기 위해 한국 공장에서 일하던 반장들을 다수 파견했다)과의 소통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여직원 기숙사 한켠에 방 하나를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남자 상급자가 여직원 기숙사에 머물다니, 피차 편치만은 않았다. 화장실도 눈치 보며 오가고, 마주치면 서로 조심스러워 했다. 하지만 이 독특한 경험은 반장들과 친분을 쌓고 현장의 관계를 현실적으로 파악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제1공장의 전경.
언어 장벽과의 전쟁
인도네시아에서 나를 기다리던 또다른 어려움 중 하나는 언어의 벽이었다. 아프리카에 가기 전에는 간단하게 불어 두어 글자라도 배우고 갔는데 인도네시아에는 워낙 급하게 와서 그럴 겨를이 없었다. 한 번은 외근을 나가서 미팅을 끝내고 건물에서 나오니 운전기사와 차가 사라져 있었다. 알고 봤더니 통역사가 운전사에게 ‘Tunggu(뚱구: 기다리다)’ 라고 말하는 대신에, 가지 말라는 의미로 말하려던 것이 ‘Pergi(뻐르기: 가다) 하지 마!’ 라고 인도네시아어와 한국어를 섞어 말하는 바람에 가도 된다고 오해한 운전 기사가 차를 몰고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언어가 정확히 전달되지 않아 오른쪽으로 작업하라는 것을 왼쪽으로 하거나, 물건의 길이가 엉뚱하게 바뀌거나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규격서를 정확히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림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인도네시아 언어로 상세한 설명을 추가하고, 실수가 생길 수 있는 모든 요소를 미리 명시했다. 나중에는 “미성 규격서는 비행기 만드는 규격서 같다”는 말이 나올만큼 규격서가 복잡해졌지만, 이런 것들이 미성 제품의 품질을 남다르게 만드는 비결이 되었다고 믿는다.
작은 변화부터, 마음가짐 바꾸기
그렇게 정신없이 적응하면서 직원들을 어떻게 한 몸 한 뜻으로 움직이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을 때 독특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인도네시아 직원들은 바닥에 휴지가 떨어져 있어도 줍지 않았다. “청소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데 왜 내가?” 라는 생각이었다. 내가 휴지를 줍고 있으면, 옆에 있던 직원이 발로 다른 쓰레기까지 밀어주며 “이것도 주우라”고 했다. 이것은 게으름이라기보다는 역할 분담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이었다. 이런 인도네시아 직원들의 마음가짐을 바꾸는 것이 최우선이 되어야 할 것 같았다.
가장 먼저 매주 월요일마다 공장에서 전체 조회를 실시하기로 했다. 그리고 조회를 시작하기 전에 특별히 인도네시아 국가인 ‘인도네시아 라야’를 함께 불렀다.
“이 회사는 한국인 해외 진출 회사가 아닙니다. 인도네시아 법인, 인도네시아 회사입니다.”
직원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했다. 처음에는 직원들도 어색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모두 큰 목소리로 국가를 부르게 되었다. 나 역시 인도네시아 라야를 우리나라 애국가만큼 잘 부르게 되었다. 앞에 선 사장이 자신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지 안 부르는지, 직원들의 시선이 내 입술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자카르타 공장 전체 모임.
모르는 것은 반드시 물어보세요
아무리 마음을 다잡고 정신 교육을 반복해도, 불량률을 줄이고 품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직원들이 작업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모르면 주저하지 말고 물어보세요. 질문할수록 더 많이 알게 됩니다.”
단순히 질문을 장려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빠르게 묻고 곧바로 답을 얻을 수 있는 실질적인 시스템이 필요했다. 그래서 도입한 것이 바로 직급별 색깔 유니폼이다. 반장은 빨간색, 검사원은 파란색, 일반 작업자는 흰색으로 구분해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 한눈에 알 수 있게 했다.
또한 각 작업대에는 작은 깃발을 지급하여, 깃발만 세우면 즉시 반장의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우리 회사는 좋은 회사, 우리 작업장은 넘버원 작업장입니다.”
이런 자부심과 함께 미성은 점차 인력 양성의 강자로 자리잡아 갔다. 나중에는 ‘미성 가발 공장 출신’이라고 하면 다른 가발 공장에서 무조건 환영받을 정도였다.

자카르타 공장 반장들의 교육 수강.
하나하나 기틀을 쌓아가며…
그렇게 직원들을 교육시키는 동시에 공장 현장 개선에도 애썼다. 공장에 발을 들여놓으면 고치고 싶은 점들이 산더미였다. 실밥 하나 자르는 데도 몇 번이나 손이 가는 쪽가위도 교체하고, 실이 끊기거나 바늘이 휜 미싱도 바꾸고, 작업자 키에 맞게 의자도 조정하고, 어두운 조명도 바꿔 달아주고……
이를 하나씩 고쳐나가는 것이 품질 향상의 기본이라 믿으며 뚝심있게 일을 해나갔다. 이렇게 기반을 다져가면서, 인도네시아 미성공장은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는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