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상사 김병철 사장
2장. ‘내 회사’라는 생각으로 달리던 시절
BNB 매거진에서는 온고지신 즉, 뷰티 업계 원로분들의 지난 이야기를 통해 현재 업계가 당면한 문제들을 풀어가자는 취지에서 회고록을 실어왔다. 지난호부터 이어진 회고록의 주인공은 미성상사 김병철 사장이다. 가발 업계에서 명성이 높은 미성의 초창기 멤버로 시작하여 50년을 꽉 채우고 지난해 퇴직한 그의 반평생 가발 인생에는 한국 가발의 역사와 더불어 두 대륙을 넘나드는 버라이어티한 사연이 담겨있다. 김병철 사장의 생생한 구술을 바탕으로 한 두 번째 이야기를 열어본다.
노사협의회 교육, 대리 강사로 뛴 사연
1970년대 후반은 한국 경제산업계 노사협의의 틀이 잡힌 시기이다. 1960년대부터 70년대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룩하면서 ‘근로자와 사용자 쌍방이 참여와 협력을 통해 노사공동의 이익을 증진함으로써 산업평화를 도모하고 국민경제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목적 하에, 종업원 50명 이상 회사에서는 의무적으로 노사협의회를 구성하여 한 달에 한 번 노측과 사측이 만나는 자리를 가져야 했다. 관리감독기관인 노동부에서는 정기적으로 조사를 나왔다.
당시 종업원이 4~500명 되었던 미성도 당연히 노사협의회 운영 대상이었다. 그런데 쉴 새 없이 가발 공정이 돌아가는 상황에서 언제 한가로이 마주 앉아 노사협의회를 하겠는가. 현장 점검이 있는 날이면 비상이 걸렸다.
“오늘 노동부 조사 나오는 날입니다. 반장들은 하던 작업 얼른 마무리하고 회의실로 모이세요!”
감독관이 보는 앞에서 회사 직원과 작업반장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노사협의하는 것처럼 연기 아닌 연기를 했다. 손발이 척척 맞고 뭐든 열심히 하는 분위기라 회의 모양새도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아뿔싸, 연기를 너무 잘한 덕인지 미성상사가 노사협의 우수업체로 선정되었단다. 게다가 근로자 노사협의회 교육에서 선진 사례를 발표해 달라고 노동부 지방사무소에서 연락이 왔고, 그 강의를 이봉상 대표이사가 맡게 되었다. 그런데 교육 당일 중요한 일정이 생기면서 불똥이 애먼 사람에게로 튀었다.
“오늘 강의, 김 차장이 대신해 줘야겠어.”
“예?! 교안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강의를 하라는 겁니까?”
사장님은 농담하듯 웃으며 한 마디 했다. “그냥 가서 적당히 얘기해. 노사협의회 잘하잖아?”
막막한 심정으로 대책도 없이 노동청으로 달려갔다. 강의실에 들어서니 근로감독관들만 아니라 마포지구, 용산지구의 다양한 회사에서 참가한 근로자 대표 150여 명이 앉아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다음은 미성상사입니다. 오늘은 사장님을 대신해서, 실제 현장에 있는 생산 책임자가 나와서 말씀해 주시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미성상사 김병철 차장입니다…”
내게로 쏠린 백여 명의 시선을 마주하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순간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그러다 결국, 솔직한 게 최선이란 생각이 들었다.
“저희 회사를 노사협의회 우수업체라고 추천해 주셨는데, 사실 저희는 노사협의회 안 합니다. 그냥 하는 시늉만 한 겁니다.”
노동부 감독관들이 다 있는 자리에서 고해성사하듯 이실직고하니 다들 놀란 표정이었고 강의실은 웅성웅성 소란이 일었다. 그 속에서 나는 꿋꿋이 말을 이어 나갔다.
“저희는 한 달에 한 번 노사협의회가 아니라 매일, 노사 간에 대화를 합니다. 사장실과 생산 차장실이 항상 열려 있어서 무슨 건의가 들어오든, 어떤 문제가 생기든 수시로 얘기하는데 노사협의회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굳이 관리감독관이 와서 조사한다니까 그날은 모여서 그럴듯하게 흉내를 냈지만, 사실은 그게 평소에 늘 하는 겁니다.”
미성의 평소 관리체제, 실제 공장에서 종업원들과의 의사소통 등을 예시를 들어가며 설명하기 시작하자 생각보다 할 말이 많았다. 회사를 집처럼 여기며 동고동락한 세월이 얼마인가. 60분 가까이 쉼 없이 얘기가 쏟아져 나왔다.
“우리 공장이라고 작업 환경에서 개선할 점이 왜 없겠습니까. 종업원들의 애로사항이 왜 없겠습니까. 얘기하면 고쳐주고, 또 얘기하면 고쳐주고, 우리는 그렇게 해서 오늘날 발전된 미성을 이뤘습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개선하고 있고 또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해 나갈 겁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고 나는 비로소 긴장을 놓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무 준비 없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문제는 그날 저녁에 터졌다. 회사로 복귀하고 몇 시간 지나 수위실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00 공장 사람들이 사장님과 차장님을 뵙겠다고 찾아왔는데, 어떡할까요?”
무슨 일인가 싶어 면담실에서 만났더니 다른 가발회사 주력 부서의 반장들이었다.
“아까 낮에 차장님의 강의를 듣고 저희도 미성에서 근무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가발 공장은 기술자가 가장 중요한 자산이다. 특히 기능공 확보에는 공장마다 혈안이 되어있는 상황이었다. 빈번한 스카웃으로 일에 차질이 생기자, 가발 공장 관리자끼리 모임을 갖고 서로 간에 스카웃을 피하자고 암묵적인 협약을 맺기도 했다. 제 발로 찾아온 인재들이야 탐났지만 당장 그 회사에 얼마나 타격이 갈지 훤히 보이니 욕심을 버려야 했다. 게다가 그 회사 생산부장은 평소에도 정보를 주고받으며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망설임 없이 전화기를 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너희 반장들이 다 우리 회사에 와 있어?! 얼른 와서 데려가고, 노사협의 좀 잘해봐!”
신부 없이 치를 뻔한 결혼식
가발의 ‘가’자도 모르고 뛰어들어 일에만 매달리다 보니 어느새 나는 30대 노총각이 되어있었다. 야근과 주말 근무를 밥 먹듯 하며 회사 밖으로 나가질 않았으니 연애고 가정이고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 서른다섯이 되던 해, 중매로 지금의 아내를 소개받았고 딱 세 번 만난 후에 약혼을 하고 바로 결혼 날짜를 잡았다.
1979년 11월, 대통령 서거의 여파로 대한민국이 시끄럽던 시기에도 변함없이 가발 공장은 돌아갔고, 나는 결혼식 당일에도 출근하여 예복을 기숙사에 걸어둔 채 오전 근무를 했다. 점심을 먹고 1시쯤 사장님이 “김 차장, 결혼식 안 가?” 하며 재촉해서야 아차 싶어 급히 씻고 옷 갈아입고 예식장으로 향했다. 장소는 장충동에 있는 엠배서더 호텔. 빠듯하게 결혼을 준비한 탓에 예식시간은 애매한 3시였다. 급한 걸음으로 결혼식장에 들어서자, 주례를 맡은 삼천리 그룹 유성연 회장님부터 삼천리, 삼탄, 미성의 임원분들과 회사동료들이 이미 다 착석해 있어서 당황스러웠다. 사회자에게 빨리 시작하라고 손짓을 했다.
“지금부터 결혼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신랑 입장!”
오전까지도 일하느라 실감을 못했는데 버진로드를 걸으니 비로소 장가를 가는구나, 실감이 났다. 주례단상 앞에 서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신부 입장을 기다렸다.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신부 입장!”
그런데 웨딩마치가 여러 번 울리도록 신부의 모습이 나타나질 않았다. 하객들은 뒤쪽을 돌아보면서 수군거렸고 영문을 모르는 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사회자 얼굴에도 낭패감이 서렸다.
결혼 행진곡이 몇 번을 되돌이표로 반복되어서야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급한 걸음으로 식장에 들어섰다. 알고 보니 신부가 외부 미용실에서 화장을 받고 오는 중이었는데, 내가 신부대기실 확인도 않고 바로 식을 시작하라고 신호를 보낸 것이었다. 뒤늦게 도착한 아내는 드레스를 잡고 거의 뛰듯이 와서 예식을 치렀다.
일하다 결혼식장으로 간 건 나만의 얘기가 아니다. 함께 일했던 전병직 실장도 그로부터 몇 년 후 나와 마찬가지로 회사에서 일하다 식장으로 갔다. 2023년 무역의 날 기념식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전병직 회장(現 (주)코리아나 대표)을 호명하여 ‘가발회사 재직 시절 결혼식 당일에도 근무하다 예식장으로 가신 분’이라고, 이런 분들이 오늘날 대한민국 경제를 일으켜 세웠다며 치하했다고 한다.
그렇게까지 일한 직원들이 있는데 회사가 어찌 잘 되지 않겠는가. 당시 미성의 식구들은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회사이기 때문에’ 열과 성을 다했다. 책임감을 넘어 주인의식을 갖고 일했던 것이다.
나 역시 지금까지 한 번도 미성이 남의 회사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내 회사이니 열심히 했고, 미성에 그런 인력이 많았으니 회사가 성장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1972년에 출발하여 10년 사이에 미성상사는 동종업계 순위권 10위 안으로 진입했다. 순위를 따질 만한 깜냥이 안되었던 회사가 몇 년 새 주력 가발회사로 부상한 것이다. 그리고 업계 5위로 우뚝 서면서, 좀 더 발판을 넓혀보자고 기획한 게 아프리카 진출이다. 그러나 나는 그 계획이 무모하다고 생각하여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1983년 6월, 내게로 아프리카 파견 명령이 떨어졌다. 이틀 후, 나는 그룹 본사의 회장님을 독대하러 갔다. 사직서를 품에 안고서.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