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상사 김병철 사장
6장. 아프리카에서 홍보하는 법

니나 홍보 모습

니나 광고판 앞에 선 김병철 사장의 딸 혜선(1990)
BNB 매거진에서는 온고지신의 취지에서 회고록을 실어왔다. 올해 회고록의 주인공은 미성상사 김병철 사장이다. 70년대 미성의 초창기 멤버로 시작하여50년을 옹골차게 채운 그의 가발 인생에는 한국 가발의 역사와 더불어 두 대륙을 넘나드는 다채로운 사연이 녹아 있다. 김병철 사장의 생생한 구술을 바탕으로 아프리카에서의 활약상을 그려본다.
판매는 광고와 바꾼다
앞선 이야기에서 언급했듯이 나는 미성상사에 입사하기 전, 삼천리 연탄에서 근무하며 삼척 탄좌, 정암 탄광 등을 두루 거쳤다. 그때 자주 듣던 말이 ‘석탄은 동발과 바꾼다’는 말이었다. 깊은 탄광에서 석탄을 캐내려면 갱도의 붕괴를 막고 작업공간을 확보할 수 있도록 나무기둥(후에는 철제기둥으로 바뀌었다) 즉 동발을 받쳐야 하는데, 광산에서는 동발이 들어간 만큼 석탄이 나온다는 얘기가 널리 통했다.
그런데 낯선 아프리카 시장에 ‘니나(NINA)’라는 새로운 브랜드를 갖고 뛰어들어 보니 제품은 광고와 바꾸는 것이었다. 아무리 열과 성을 다해 제품을 만들었어도 소비자가 몰라준다면 어디에 어떻게 팔겠는가. 과거의 제조업은 생산 설비를 가진 이가 주도권을 쥐었지만, 이제는 창의적인 제품 기획과 마케팅을통해 브랜드가 시장을 주도하는 시대로 변화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제품 출시 초기, 자금이 부족해서 종업원 급료를 빠듯하게 지급하던 형편에도 우선은 니나 이름을 알리는 광고에 힘을 쏟았다.
제일 먼저 시도한 게 라디오 광고로, 세네갈 국민가수인 유순두르(Youssou N’Dour)가 월로프어로 부른 ‘니나 CM송’은 점심시간에 맞춰 중앙방송(O.R.T.S)을 통해 곳곳에 울려 퍼졌다. 얼마 안 돼 골목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사이에서도 ‘아, 니나오, 니나~’라는 노래가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원래 니나라는 이름 자체도 미성과 합작사가 아프리카 진출을 구상하던 초기에 참여했던 현지인의 딸 이름으로, 아프리카인들에게 친근한 어감이었다.
니나란 이름이 입에서 입으로 퍼질 무렵, 다음으로 시도한 게 잡지책 광고였다. 당시에는 ‘아미나(AMINA)’라는 유명한 월간 프랑스어 잡지가 있었는데, 여기에 처음에는 반쪽 광고를 싣다가 이후 한 페이지로 늘리고 나중에는 세 페이지에 걸쳐서 1/3 광고를 실었다. 광고는 니나의 상징인 빨간색 바탕에 하얀글씨로 브랜드명을 새긴 단순한 형식이었는데, 이것이 아프리카 전역으로 배송되면서 니나 이름을 널리 알리는 단초가 되었다.

월간 프랑스어 매거진 아미나(Amina). 1972년 창간하여 3년 간 세네갈에 본사를 두었다가 1975년 파리로 이전했다. 초기에는 아프리카 흑인 여성을 대상으로 했으나 이후 유럽, 북미 흑인 여성으로 독자층을 확대했다.
광고에 탄력을 받다 보니 아이디어는 끊임없이 나왔다. 거리 곳곳에 눈에 띄도록 빨간색 입간판을 세우고, 이번에는 움직이는 광고를 해보자 해서 버스 광고를 진행했다. 세네갈 관공서, 시장, 도로 어디서나 니나 광고를 부착한 버스를 흔히 볼 수 있었다. 당시 버스 광고를 많이 하는 회사들 중에는 코카콜라와말보로가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니나까지 셋 다 빨간색 바탕에 하얀 글씨로 컨셉이 똑같았다. 그러다 보니 말보로, 니나, 코카콜라 광고를 대형으로 나란히붙여서 홍보하기도 했다.

세네갈 외무성을 지나는 니나 광고 버스

니나 광고 버스 앞에 선 미성상사 이봉상 사장
급기야는 비행기 광고에까지 도전했다. 당시 에어 아프리카(Air Afrique) 항공사가 파나마를 거쳐 뉴욕으로 가는 노선을 운영했는데, 승객들은 좌석 벨트를 매면 “매쉬(mèche: 불어로 머리 타래라는 뜻) 니나”라는 광고를 마주하게 되었다. 가발이나 브레이드 유통을 위해 뉴욕으로 오가던 승객이 많았던 점을 노린 것이다.
이렇게 니나 브랜드는 아프리카 거리 곳곳만 아니라 하늘길까지 수놓았고, 그만큼 사람들에게 선명히 각인되면서 니나 제품도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가기시작했다. 결국 판매는 광고와 바꾼다는 전략이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니나 광고를 실었던 에어 아프리카
이러다 보니 “아프리카에 이 돈을 가지고 가서 어떻게 하니까 다 없어지더라, 그것만 정확히 알아오라”는 유성연 회장님의 요청은 목표를 넘어선 지 오래였다. 니나 비너스는 미성 본사의 추가 지원 없이 세네갈에서 번 수익만으로 재투자를 이어갔고, 광고만 아니라 아프리카 곳곳에 공장 설립도 이어졌다.
NINA 사진관을 열다
1983년 세네갈 자유무역지구(Zone Franche)에 설립된 비너스 인더스트리는 든든한 배경이 되어준 현지 인맥과 광고의 힘을 타고 니나(NINA)란 브랜드명으로 탄탄히 뿌리내렸다. 그리고 불과 2년 후에는 카메룬(Cameroon) 공장이, 또 2년 후에는 토고(Togo) 공장이 잇따라 세워졌다. 여기에는 거창한확장 계획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세네갈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을 인근 기니(Guinea)나 기니비사우(Guinea Bissau), 말리(Mali) 등에 수출하다 보니 국경을 넘을 때마다 관세를 내야 했다. 나라별로 관세를 내고 장사해서는 마진이 남지 않았다. 작은 소매상들은 트럭 편으로 봇짐장사처럼 국경을 저렴하게 통관하곤 했지만, 차량으로 운송하기 어려운 곳에는 그렇게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결국 관세를 피하려면 그 나라에 공장을 세워서 제품을 직접 생산, 판매하는 게 최선의 방책이었다. 따라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아프리카 각국에 공장을 늘려 나가게 된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이 말처럼 수월했던 건 아니다. 특히 인구가 많고 시장이 커서 주요 타깃으로 삼았던 나이지리아(Nigeria)의 경우, 진입하는 데 여러 장벽이있었다. 이미 나이지리아의 대표 시장인 발로군 시장(Balogun Market)에만 100여 군데 브레이드 판매상이 터를 잡고 있는 데다, 어렵게 들어가서 물건을 팔더라도 환전이 큰 걸림돌이었다. 나이지리아는 화폐 단위가 나이라(NGN, ₦)여서, 이를 달러 또는 CFA 프랑으로 바꿔 나오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포기하기에는 욕심나는 시장이고, 뾰족한 방안은 없고… 고민하던 차에 틈새의 가능성을 찾은 게 ‘사진관’이었다. 당시 아프리카에서는 돈을 벌려면 가발상 아니면 사진관을 한다 할 정도로 사진 현상소의 인기가 높았다. 때마침 세네갈 다카르에서 코닥사 출신의 재능 있는 젊은이를 만났고, 그를 채용하여 나이지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베냉공화국(Republic of Benin)에 ‘니나 포토’라는 사진관을 열었다. 니나 포토는 현지에 니나 이름을 알리는 동시에 나이지리아 상인들의 비즈니스 거점으로서 가교가 되었다.

베냉에 세워진 니나 사진관
아프리카에 널리 퍼진 이름, NINA
그런 과정을 거쳐 나이지리아 시장을 좀 더 파악한 후 결국에는 나이지리아 공장도 세우게 된다. 세네갈에서 시작된 니나 비너스는 몇 년 새 카메룬, 토고,남아프리카공화국, 나이지리아, 코트디부아르까지 6개 직영 공장을 갖추고 인접 국가로 뻗어 나갔다. 그야말로 아프리카 어디서든 ‘니나’ 이름이 통하던 황금기였다.
공장을 새로 하나씩 지을 때마다 회사에서의 직급도 부장에서 이사, 상무, 전무를 거쳐 부사장까지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게 진리인 건지, 내가 자처한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렇게 일을 벌이다 보니 중도에 발을 뺄 수 없는 상황이었고, 1년을계획하고 왔던 아프리카행은 어느덧 강산이 변할 만큼의 세월을 지나고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