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상사 김병철 사장
5장. 아프리카에서 우군을 만드는 법
BNB 매거진에서는 온고지신의 취지에서 회고록을 실어왔다. 올해 회고록의 주인공은 미성상사 김병철 사장이다. 70년대 미성의 초창기 멤버로 시작하여50년을 옹골차게 채운 그의 가발 인생에는 한국 가발의 역사와 더불어 두 대륙을 넘나드는 다채로운 사연이 녹아 있다. 김병철 사장의 생생한 구술을 바탕으로, 아프리카에서의 본격적인 이야기를 펼쳐본다.
니나 비너스의 홀로서기
1983년. 당시 국제통신은 주로 텔렉스를 썼다. 우체국에 가서 텔렉스 코드를 찾아 문자로 전하는 방식이었다. 국제전화가 가능하긴 했지만 요금이 너무 비싸서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12월 초, 밤늦은 시각에 미성상사 이봉상 사장님으로부터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그만큼 다급한 사안이라는 얘기다.
“김 부장! 합작사에서 지분을 빼 달라고 연락이 왔는데, 어떡하지?”
아프리카 상황을 지켜보던 파트너 사에서 전망이 불투명하다고 판단하여 투자를 철회하기로 했단다. 로컬 판로가 막힌 데 이어 합작선 철수까지, 엎친 데덮친 격이었다. 아프리카에 온 지 불과 석 달, 니나(NINA) 브랜드가 닻을 올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아프리카 사업을 접느냐 마느냐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혼자서 이 높은 파고를 넘는 건 무리였다. 그런데 불현듯 아프리카를 떠나올 때 유성연 회장님이 해준 말씀이 떠올랐다. ‘자네는 이돈을 갖고 가서 어떻게 하니까 다 없어지더라, 그것만 정확히 알아오면 돼.’
그래, 내가 돈 벌러 왔나. 경험의 대가라 생각하고 부딪쳐 보는 거야. 초당 올라가는 전화요금을 의식하며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사장님. 까짓 거, 우리가 인수합시다!”
구명줄을 잡고 위기를 넘다
당장 급한 건 하루라도 빨리 막힌 판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알아보니 니나의 로컬 판매를 금지한 건 세네갈 정부가 아니라 이슬람교 지도자였다. 세네갈은 인구의 94%가 이슬람교도인 탓에 이슬람교 지도자는 정치・사회적으로 굉장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고, 일개 외국인이 함부로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나는 이때를 위해 몇 달간 공들인 인맥을 동원했다. 당시 산업공단을 총괄하던 파마라 산냐 (Famara Shna) 청장이었다.
산냐 청장과의 첫 만남은 세네갈에 막 도착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약속시간에 맞춰 일찍 공단청으로 향했는데 교통체증 때문에 5분을 늦고 말았다. 청장실에 들어갔더니 불호령이 떨어졌다.
“당신들은 프로토콜(protocol; 의례, 예우)이 그것밖에 안되는 거요? 어떻게 첫 면담인데 늦을 수가 있소!”
“죄송합니다. 일찍 나섰는데 길이 막혀서…”
“대통령과 면담해도 이랬을까! 오늘 면담은 취소요. 날짜를 잡고 다시 오시오!”
5분 지각으로 대차게 퇴짜를 맞고 돌아오는 길, 어이없기도 했지만 어떻게든 이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실제로 산냐 청장은 미국의 월드뱅크에서도 근무했던 엘리트로, 훗날 세네갈 3개 부서 장관을 거쳐 경제사회위원회 위원장까지 역임한 인물이다.
실패한 첫 만남 이후로 나는 그와의 관계에 제대로 정성을 쏟았다. 사소한 선물이라도 챙겨가며 틈만 나면 찾아가 돌아가는 공장 사정을 얘기했고, 만남이거듭되면서 청장도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프리카 진출 후 처음 맞닥뜨린 위기에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주었다.
산냐 청장의 추천으로 기적처럼, 투바(Touba)에 자리한 이슬람교 성전에서 칼리프(Caliph; 지도자)를 대면할 기회를 잡게 되었다. 칼리프는 이슬람교 창시자 무함마드의 후계자를 가리키는 용어로, 이슬람교에서는 칼리프의 옷자락에 손만 닿아도 병이 낫는다는 인식이 있을 정도로 그 권위가 대단했다. 현지인들은 그분이 지나가면 땅에 엎드리면서 그림자만이라도 닿으려 애썼다. 우리에게도 구명줄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칼리프 앞에 자세를 낮추고 간청을 했다.
“저희가 먼 한국에서 여기까지 온 건 우리 업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종업원들을 가르치고 여기서 나온 이윤으로 세네갈을 보다 발전시키기 위해서 온 겁니다. 수출공단에서 만든 제품은 로컬에서 판매할 수 없다는 명목을 들었는데, 한-세네갈 협정에 따르면 수출공단 제품의 20%는 로컬 판매가 허용되어 있습니다.”
당초에 니나의 판매 금지 명령은 우리와 경쟁관계에 있던 로컬 업자가 종교 지도자를 찾아가 하소연한 후 내려진 조치였다. 아무래도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 그럼에도 우리 얘기를 들은 칼리프는 이성적인 판단을 내려주었다.
“알겠소. 들어보니 그쪽 입장이 이치에 맞군. 로컬 판매를 허가하리다.”
손(손해) 보는 사람이 되어라
누군가 내게 회사생활을 잘하는 비결을 물으면 ‘우군을 많이 만들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우군을 만드는 비결을 물으면 나는 학창 시절 교훈을 떠올린다. 내가 다닌 중학교의 교훈은 유난히도 길고 별났다. ‘손 보는 사람이 되어 다오. 이 충무공도 크게 손 보았느니라.’
이순신 장군도 크게 손해 보고 살았다는데, 내가 손해 본들 얼마나 보겠나. 그리고 나는, 인간관계에서는 좀 손해 보는 것이 결국은 득으로 돌아온다고 생각한다. 그 이치를 일깨워준 건 앞서 말한 산냐 장관과의 인연이었다.
공단청장에서 장관까지, 산냐 장관이 승승장구하는 동안 나도 부장에서 부사장으로 승진을 거듭했다. 직위와 근무처가 달라져도 내게는 장관 집을 자주 드나들 수 있는 명분이 있었다. 머리 치장이 필요했던 장관 부인에게는 니나 제품을 소개했고, 영어가 통하는 어린 자녀들과 자주 대화하여 소소한 물품을 구해다 주었으며, 방문할 때마다 잔손이 가는 허드렛일을 자처했다. 정원에 시든 식물이 있으면 뽑고 딴 걸 심거나 가지치기를 하고, 어린 시절 관상어를 키워본 경험을 살려 큰 어항과 열대어를 선물한 후 꾸준히 관리를 해주었다.
꽃이 시들어서, 물고기가 죽어서, 어항 물을 갈아야 해서… 내가 방문할 이유는 수없이 많았다. 그리고 퇴근해서 오는 산냐 장관을 예약 없이 독대할 수 있었다. 장관이 보기에도, 명색이 해외 투자업체의 대표 격인 사람이 자기 집에 와서 팔 걷어붙이고 어항을 청소하고 있으니 늘 “무슈 킴, 메르시 보꾸(Mr. Kim, thank you)!”하며 고마움을 전했고 가족 모임에도 자주 초대를 했다. 나 또한 업무라 생각하고 억지로 한 게 아니라 스스로 내켜서 한 일이라, 몸은피곤했지만 마음은 즐겁고 뿌듯했다. 그리고 결국 이러한 관계에서, 100만 불을 아낀 저력이 나왔다.
100만 불 가치의 인연
어느 날 공장에 세무서 고지서가 날아들었는데, 부과된 세금이 상상을 초월한 금액이었다. 수출공단에 있어서 부가세를 면제받고 제품을 판매했는데, 로컬에 판 건 부가세를 매겨야 한다며 최초로 판 것부터 지금까지 모든 부가세를 산정하고 거기다 미납 과태료까지 붙여서 액수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이다. 당시 가치로 100만 불 이상, 회사를 팔아도 막을 수 없는 금액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절박한 심정으로 당시 재무부 수장으로 있던 산냐 장관에게 달려갔다. 상황을 들은 장관의 답은 “알겠다”는 짤막한 한 마디.
그리고 바로 다음날, 거짓말처럼 세금 건이 취소되었다. 장관의 말 한마디로 100만 불 세금이 감면된 것이다. 나라, 인종, 종교의 차이를 떠나 진심을 다한인간관계의 가치는 값으로 매길 수 없다는 걸 실감한 사건이었다.
나는 대체로 인간관계를 이렇게 맺었다. 어찌 보면 미련하게 보일만큼, 내가 조금 수고스럽고 손해 보더라도 사람들과 소통하는 데는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니나의 로컬 판매를 허락해 준 칼리프와도 공장에서 2시간 반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 교류를 했다. 우리는 서로의 종교에 대해 포용하고 배웠으며,쿠스쿠스(couscous)를 함께 나눠먹었고, 그의 아들과도 친분을 쌓아 투바의 성전 개축 공사를 한국 회사와 추진하기도 했다.
이슬람 최대의 명절인 따바스키(Tabaski) 기간에는 양을 잡는 전통을 따라 세네갈의 주요 인사들에게 일일이 흠 없고 건강한 양을 선별하여 보냈다. 이때양은 속죄의 의미를 지니는 터라 그들은 양의 값어치 이상으로 고마워했고 피부색이 다른 이방인에게 기꺼이 마음을 열어주었다. 가족 친지들이 다 같이모여 세네갈의 전통 음식인 체부 젠(Ceebu Jen; 생선을 넣어 지은 쌀밥)을 먹는 날에도 우리 가족을 초청했고, 우리는 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현지방식대로 큰 접시 주위에 둘러앉아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 공적인 관계를 떠나 말 그대로 밥을 같이 먹는 ‘식구’가 된 셈이다.
그렇게 쌓은 인맥은 한국의 미성이 중앙아프리카에서 탄탄히 뿌리내리는 데 일조했다. 세네갈을 시발점으로 날개를 단 니나 비너스는 2년 후 카메룬 공장을, 또 2년 후에 토고 공장을 잇따라 세우며 아프리카 곳곳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