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상사 김병철 사장
4장. 검은 대륙에 공장을 세우다
BNB 매거진에서는 온고지신의 취지에서 회고록을 실어왔다. 올해 회고록의 주인공은 미성상사 김병철 사장이다. 70년대 미성의 초창기 멤버로 시작하여 50년을 옹골차게 채운 그의 가발 인생에는 한국 가발의 역사와 더불어 두 대륙을 넘나드는 다채로운 사연이 녹아 있다. 김병철 사장의 생생한 구술을 바탕으로, 아프리카에서의 본격적인 이야기를 펼쳐본다.
아프리카의 첫인상
아프리카 세네갈로 가는 길은 거의 이틀이 걸렸다. 한국에서 아프리카로 가는 직항이 없다 보니 대한항공으로 프랑스까지 13시간, 파리에서 10시간의 체류 후 에어프랑스로 갈아타고 다시 세네갈의 수도 다카르(Dakar)까지 7시간을 날아가야 했던 것이다. 공항에서 숙소가 위치한 뤼피스크(Rufisque)까지는 또다시 차로 1시간 반을 달려야 했다. 캄캄한 밤에 도착한 숙소는 텅 빈 공간에 침대만 덜렁 있어 마치 군용 막사 같은 삭막한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긴 여정에 기진맥진해서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습관처럼 일찍 눈이 뜨였다. 호기심에 숙소를 나가보니 아침부터 무리 지어 뛰어노는 동네 아이들이 보이는데, 여기가 아프리카로구나 절로 실감이 났다. 말로만 들었지, 피부색이 새카만 아이들을 처음 봤던 것이다. 반대로 아이들 눈에는 내가 신기한 생김새인 지라, 우리는 마치 콜라병을 처음 발견한 부시맨처럼 한참을 서로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대륙’ 아프리카의 첫인상은 그렇게 강렬하게 뇌리에 박혔다.
공장은 있는 것이 아니라 짓는 것
한 사발의 카페오레와 바게트로 아침을 먹고 공장으로 향하는 길, 차창 밖으로 지나치는 낯선 풍경들을 바라보며 새로운 도전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기대감이 부풀었다. 이렇게 미지의 땅에 미성이 진출을 했구나, 낯선 환경이지만 첫 발을 디뎠으니 잘해야지, 새삼스레 각오도 다졌다. 공장은 다카르 도심에서 20㎞쯤 떨어진 수출자유공단, 불어로 ‘존 프랑시(zone franche)’에 위치해 있었다. 외국인이 투자한 기업들이 입주한 곳으로 세네갈 정부는 입주업체의 법인세를 덜어주고 외국에서 들여오는 원부자재와 차량, 유류에 매기는 세금을 면제해 준다.
그런데 존 프랑시 내 미성 공장에 도착했을 때 나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공장이 있어야 할 곳에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경계 표시만 있을 뿐 건물은 커녕 아프리카 적도의 땡볕을 피할 그늘도 나무도 하나 없는 빈 모래땅이 1헥타르나 펼쳐졌고, 그 곳에 공장을 세워야 하는 것이 우리의 첫 임무였음을 그제야 알았다.
앞이 캄캄했지만 주저앉아 있을 여유가 없었다. 미리 주문한 조립식 건축 자재가 컨테이너로 바다를 건너오는 상황이었고, 모래 땅에 건물을 올릴 순 없으니 바로 기초공사에 착수해야 했다. 그때부터 한 달간 꼬박 땅을 다졌다. 마치 시지프스가 바위를 들어 올리듯,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을 고스란히 맞으며 모래 바닥을 시멘트로 보강하고 물을 붓고 땅을 다지는 공사를 한 달여, 건축 자재가 들어와서 본격적인 건물 공사가 시작되어서도 수 차례 고비가 이어졌다. 건축 경험이 전무후무한 나와 고영준 과장이 책임을 맡다 보니 설계도면 해석 과정에서 한참을 옥신각신했고, 무엇보다 건축 장비들이 하나같이 수동 장비였던 까닭에 작업하는 내내 마음을 졸여야 했다. 무거운 철근을 지렛대로 올린 후 도르래 방식으로 끌어당겨 세우는데, 돌이켜 생각해도 사고 없이 건물을 조립했다는 게 기적처럼 여겨진다. 어쨌든 우리는 최대한 빠른 공사를 위해 해질 무렵까지 작업을 강행했고, 덕분에 불과 한 달 만에 번듯한 건물을 완공할 수 있었다. 1983년 10월, 세네갈의 수출공단에 미성상사의 아프리카 현지 회사 ‘비너스 산업(Venus Industry Inc.)’이 우뚝 선 것이다.
종업원 훈련 방법은 “Follow me!”
공장이 뼈대를 갖추기 시작하면서, 정확히는 지붕을 얹어 햇볕 피할 곳이 생겼을 때쯤 미리 종업원 모집을 시작했다. 일차로 50여 명을 모집했는데 ‘외국인 공장이 생겼다, 가발을 만든다’는 소문이 나면서 일자리를 얻으려는 현지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지역의 고위 관리 자재들부터 그와 관련된 사돈의 팔촌까지 모조리 소개장을 들고 찾아오는 바람에, 그대로 뽑았다간 관리가 막막한 상황이었다. 결국은 소개서 들고 온 이들을 가능한 한 배제하고 우리 나름의 종업원 선발 기준을 세워야 했는데, 말이 통하지 않으니 면접을 보거나 시험을 치르게 할 수도 없고, 결국 고민하다 짜낸 방법이 손동작 테스트였다.
간단한 불어로 ‘손 펴, 주먹 쥐어, 손가락 접어봐, 하나 둘 셋 넷’… 그런데 땅콩 농사 같은 거친 일을 해온 이들이라 기본적인 손동작조차 안 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런 이들을 거르고 어렵게(!) 취업 관문을 통과한 사람들 중 남자들은 머리를 빗는 하클 작업에, 여자들은 머리를 밴드로 감고 정리하는 작업에 배치했다. 그러나 아직 생산시설이 완비되지 않은 상태라 바로 제품 생산에 투입할 수는 없었다.
우선 종업원들이 지시를 잘 따르도록 훈련시킬 방안이 필요했는데, 의사소통이 원활치 않은 상황에서 결국 가장 쉬운 방법은 “Follow me!”, 즉 내가 시범을 보이고 종업원들이 그대로 따라오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한국에서 받았던 새마을 교육에 착안하여 구보 훈련을 시작했다. “Follow me, follow me! Un, deux, trois(하나, 둘, 셋)!” 구령을 붙여가며 매일 아침 일과 시작 전, 2km에 가까운 공단 부지를 다 같이 돌았다. 그런 다음엔 직접 시범을 보이며 손동작을 가르쳤다. 손을 쥐었다 펴고, 손가락을 꺾어가며 하나 둘 셋 넷 세고, 아이들 노는 식으로 잼잼하고, 그런 시간이 쌓여가며 종업원들은 점차 동작이 유연해지고 일하는 자세 또한 잡혀가기 시작했다.
니나(Nana)의 출발과 위기
인력이 갖춰지고 10월에 건물이 완공되면서 곧바로 제품 생산에 착수했다. 그리고 11월, 비너스 산업의 브랜드 ‘니나(Nina)’라는 이름으로 브레이드가 출시되었다. 아프리카에 온 지 두 달 여, 갖은 고생 끝에 제품을 출시하니 마치 세상에 자식을 내놓는 기분이랄까.
수출에 앞서 로컬 시장부터 공략하기로 하고 새로운 브랜드를 어떻게 알려야 할지 방도를 고민했는데, 한정된 예산 안에서 가장 효과 좋은 방법이 라디오 광고였다. 니나 제품을 소개하는 CM송, 이름하야 ‘니나 송’을 만들어 현지에 널리 알리자고 기획하고 노랫말도 현지어인 월로프(Wolof)어로 제작했다. 세네갈의 공용어는 불어지만 인구의 대다수가 월로프어를 모국어 또는 제2외국어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제작사에 ‘세네갈의 조용필 같은 가수’를 요청했더니 추천해온 사람이 유순두르(Youssou N’Dour). 훗날 아프리카 최초의 글로벌 슈퍼스타 뮤지션이자 세네갈의 문공부 장관까지 지낸 인물이다. 그리하여 유순두르가 부른 ‘니나 송’은 점심시간마다 줄기차게 라디오를 장식했고, 현지인들이 니나란 이름에 친숙해지면서 니나 브레이드의 시장 반응도 올라오기 시작했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그런데 그해 말, 제품이 출시되고 한 달 남짓 지난 시점에 갑자기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니나 제품의 로컬 판매가 금지됐다는 것이다. 수출공단의 제품은 내수용이 아니라는 논리인데, 우리 입장에서는 문전옥답을 두고 고개 넘어 먼 산에다 농사를 지으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한-세네갈 대통령의MOU 협의사항과도 다르지 않느냐고 항의했지만, 종교 지도자의 명령이라며 아예 통하질 않았다.
이 와중에 또 하나 당황스러운 소식이 더해졌다.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합작 파트너가 투자금을 빼겠다는 의사를 전해온 것이다. 아프리카 사업은 사면초가의 위기에 직면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