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상사 김병철 사장
3장. 숙명처럼 정해진 아프리카행
BNB 매거진에서는 온고지신 즉, 뷰티 업계 원로들의 지난 이야기를 통해 현재 업계가 당면한 문제들을 풀어가자는 취지에서 회고록을 실어왔다. 올해 회고록의 주인공은 미성상사 김병철 사장이다. 70년대 미성의 초창기 멤버로 시작하여 50년을 옹골차게 채운 그의 가발 인생에는 한국 가발의 역사와 더불어 두 대륙을 넘나드는 다채로운 사연이 녹아 있다. 김병철 사장의 생생한 구술을 바탕으로, 세 번째 이야기를 열어본다.
아프리카행을 위한 물밑 작업
1983년 미성상사는 순조롭게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삼천리 그룹에서 인수한 지 불과10여 년 만에, 가발 업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중견회사로자리매김한 것이다. 큰 기업들은 슬슬 노동집약산업인 가발업에서 손을 떼고 다른 사업 분야를 모색했지만, 미성은 우직하게 한 우물을 팠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아프리카 진출’이라는 큰 꿈을 품기 시작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도전이었지만 미성으로서는 나름의 합당한 명분이 있었다.
미국으로 수출한 가발이 얼마나, 어떻게 팔리는지 분석하는 과정에서 제품의 상당수가 다시 아프리카로 역수출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따라서 직접 수출이나 현지 생산 판매의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특히 미성에서 거점으로 삼으려 했던 세네갈은 1982년 전두환 대통령이 아프리카를 순방했을 때 경제·기술 협정을 맺은 곳이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으로 미성상사는 미국의 거래선인 알리시아와 공동으로 시장조사를 마친 후 각각 20 만 달러씩투자하여 합작법인 설립을 추진했다.
이렇게 윗선에서 아프리카행을 위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었지만, 이 같은 사실을 직원인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한 차례 아프리카 진출에 대한 사내 회의가 열리긴 했지만, 가발 업계만 아니라 어떤 기업도 아프리카에 진출한 사례가 없던 시절이었기에 실현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그해 5월, 갑작스레 전 직원을 대상으로 사내 불어 강좌가 열리면서 슬슬 불안감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행여 아프리카 진출이 결정된다면 파견될 책임자는 손에 꼽혔으니 말이다.
“이러다 정말, 나나 김 부장 중에 가는 거 아냐? 해외 사업소를 신설하는 일이니 적어도 부장급이 가야 되잖아.”
당시 생산을 맡고 있던 홍수강 부장은 부모님이 편찮으신 상황이라 표정이 어두웠다.
“에이, 설마. 아프리카 진출이 말처럼 쉬워?”
“지난번 회의에서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난 당장은 가기 힘든데…”
나 역시도 연로하신 부모님과 임신중인 아내를 생각하면 막막하긴 마찬가지였다. 답 없는 논의를 하다 의심을 털어냈다.
“대한민국에 아프리카를 뚫은 회사가 어딨어? 언제 갈 지, 계획하다가 취소될 지 아무도 모르니 그냥 이 참에 불어나 배워보자고!
당시 강사를 맡은 이는 삼립식품에 근무하고 있던 고영준씨로, 퇴근 후 미성을 방문해 1시간 강의를 했다. 어쨌든 불어 강좌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옆으로 잘 새긴 했지만.
“자, 사람을 만나면 영어의 ‘How are you?’처럼 어떻게 지내세요,하고 인사를 해야겠죠. 꼬망딸레부?”
“꼬망딸레부!”
“불어로 하나 둘 셋은 앙 드 트와!”
“앙 드 트와!”
아프리카는 먼 나라 얘기만 같고 일과시간 후니 다들 피곤하기도 해서 긴 시간 집중은 무리였다. 게다가 불어 전공자였던 고영준씨가 프랑스와 아프리카여행 경험이 있던 터라 어학 강의는 곧잘 여행담으로 빠지곤 했다. 다들 막연하게 ‘아프리카 가는 건 말도 안돼’ 하면서 그저 부담 없이 즐겁게 불어 강의를들었다.
그러기를 한 달, 내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이봉상 사장님이 날 부르더니, “김 부장이 아프리카 파견을 먼저 가셔야겠습니다.”라고 본사의 인사발령을 미리 전해온 것이다.
삼천리 회장님과의 담판
이틀 후, 나는 주머니 속 사표를 확인하며 비장한 결심으로 삼천리 그룹 회장실을 찾았다.
“김 부장! 아프리카 간다면서? 축하하네!”
유성연 회장님의 환한 미소에 주춤했지만, 눈을 질끈 감고 준비해간 말을 읊었다.
“회장님, 죄송합니다. 저는 못 갈 것 같습니다. 경험도 없고 능력도 안 되어서, 제가 아프리카로 가는 건 저를 봐서도 회사를 봐서도 마이너스입니다. 꼭 가야 된다면 회사를 그만두겠습니다.”
그러자 회장님은 단호한 어조로 반박했다.
“그러면, 김 부장보다 그걸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어? 있으면 천거해 봐. 불어도 하고 아프리카도 잘 알고 가발도 잘 만드는 사람, 그 세 가지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어딨겠어. 그래도 김 부장은 가발회사 출신이니 한 가지라도 갖고 있지 않나. 자네도 이제 곧 불혹인데 뭘 한 번 해보겠다는의욕도 없이 그저 회사에서 부장, 파트장 그렇게 있을 거야? 회사를 맡아서 움직여볼 그런 포부가 없는 게야?!”
“회장님, 제가 아프리카에 가기 싫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이건 제가 생각하기에 할 수 없는 일이라서 못 가겠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용기와 도전정신, 그것만 갖고 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여기에 투자금을 가지고 가는데 이걸 지키고 돈을 벌 자신이 없습니다. 지금 회사를 그만두면 열심히 일 잘하는 직원이란 평가라도 받을 텐데, 아프리카 가서 회사 다 말아먹고 들어오면 낙오자로 손가락질만 받지 않겠습니까.”
나로서는 이유 있는 항변이었다. 그런데 회장님이 내놓은 답변은 내 근시안을 훨씬 뛰어넘는 말이었다.
“이 사람아, 내가 지금 자네를 아프리카에 돈 벌어오라고 보내겠나? 자네 얘기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보내면서 이걸로 돈 벌어 오라면 내가 도둑놈이지. 하지만 대한민국이 아프리카에 진출하려면 누군가는 그 길을 터야 될 거 아닌가. 김 부장은 단지 이 돈을 가지고 가서 어떻게 하니까 다 없어지더라, 그것만 정확히 알아오면 돼.”
회장님의 뜻을 알고 나니 더는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내게는 새로운 도전 기회이기도 했기에, “돈 다 잃어버려도 좋으시다 그러면 뭐, 구경 삼아 가죠.”하고 호기롭게 답했다.
“그래, 잘해봐! 당장은 안 되더라도 서서히 고쳐 나가고 해결하면 결국은 되는 방향으로 가게 돼 있어. 우선은 안 되는 게 뭔 지 알아야 고치든지 할 거 아닌가. 지금은 그걸 배우러 가는 거야.”
동반자와 함께 아프리카로
얼떨결에 수락하고 나왔지만 정신 차리고 보니 앞이 캄캄했다. 말 한마디 안 통하는 낯선 나라에서 뭘 어떻게 해나간단 말인가. 어떻게든 살 길을 찾아야겠단 생각에, 그 길로 불어 강사를 찾아가 절박하게 매달렸다.
“고영준씨, 날 좀 살려다오. 이 참에 나랑 아프리카 한 번 더 가지 않을래? 내가 딴 건 자신 없지만 해보겠다는 의욕과 든든한 지원책은 있네. 설령 일이 잘안 풀려서 밥을 두 끼 먹게 되더라도 당신은 어떻게든 세 끼를 다 먹일 테니, 날 믿고 좀 도와주라.”
후에 한 얘기지만, 고영준씨는 강의하면서 누가 아프리카에 파견될 지 미리 짐작했다고 한다. 불어 수업 때 그래도 제일 열심히 따라서 공부한 사람이 나였다고, 그래서 내게 오더가 떨어질 줄 예상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예상에 자기가 포함되진 않았지만.
내 절박한 부탁에 마음이 움직였지만, 고영준씨가 주저했던 건 아직 미혼이란 점이었다. 아프리카로 가게 되면 결혼이 늦어질 것을 걱정하기에, 급히 아내감을 물색하고 번개불에 콩 볶아먹듯 결혼을 진행했다. 새신부는 결혼한 지 두 달 만에 신랑을 해외로 보내게 된 셈이다. 그러나 큰 부담을 갖지 않은 건 한정된 기간 때문이었다. 미성의 관리 특성상 관리/생산부장이 1년씩 순환하며 근무하던 시기였기에, 1년 먼저 가서 셋업을 하고 교대하면 되리라 생각했던것이다.
그 1년이 10년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1983년 8월 말 우리는 미지의 땅 아프리카로 향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