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상사 김병철 사장
1장. 가발의 ‘가’자도 모르고
시작한 가발 인생
BNB 매거진에서는 온고지신 즉, 뷰티 업계 원로분들의 지난 이야기를 듣고 이를 통해 오늘 업계가 당면한 문제들을 풀어가자는 취지에서 2014년부터 회고록을 실어왔다. 아쉽게도 팬데믹을 거쳐오며 잠시 중단되었으나 처음의 기획의도를 살려 이번부터 재개하고자 한다.
새로운 회고록의 주인공은 미성상사 김병철 사장이다. ‘가발 인재 아카데미’로 불릴 만큼 가발 업계에서 명성이 높은 미성상사, 김병철 사장은 이곳의 초창기 멤버로 시작하여 50년을 꽉 채우고 지난해 퇴직을 맞았다. 50년 근속, 한 마디로 압축되지만 여기에는 한국 가발의 역사와 더불어 두 대륙을 넘나드는버라이어티한 사연이 담겨있다. 그 수많은 이야기들을, 김병철 사장의 구술을 바탕으로 사실적으로 재구성한다.

현재의 미성상사(서울 용산구 원효로 1가 재개발 지역 소재) 본사 건물을 배경으로 선 김병철 사장
연탄 회사에서 가발 회사로
1967년, 제대 후 입사한 나의 첫 직장은 ‘삼천리 연탄주식회사’였다. 입사시험으로 국어, 논술, 일반상식, 역사, 주산시험까지 치러야 했고, 한창 신문기사에 연탄가스 중독사가 오르내리던 때라 ‘연탄가스에서 해방되는 연탄을 만들자’는 다소 엉뚱한 논리로 논술을 썼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나는 당시 7 대 1 가량의 나름 높은 경쟁률을 뚫고 삼천리에 공채 7기로 입사했다.
그리고 성동공장에서의 신입 오리엔테이션으로 시작하여 5년 간 본사를 거쳐 이문공장, 수색공장 등 삼천리 그룹 내의 여러 공장을 섭렵했고, 계열사인 삼척탄좌에서도 근무했다. 그러다 1972년, 내 인생의 획을 긋는 사건이 일어났다. 삼천리 그룹에서 가발 회사인 미성상사를 인수하면서 하루아침에 연탄회사에서 가발회사로 적을 옮기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비로소 나의 가발 업계 인생 1막이 올랐다. 내가 ‘50년 근속’이라 얘기하는 건 삼천리를 빼고 순수하게 미성상사에서만 근무한 기간을 말하는 것이다.

좌)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에 있었던 삼천리 연탄공장 ©MBC뉴스

우) 구 삼척탄좌 광업소 건물 ©중앙일보
미성으로 옮겨오던 당시, 가발에 대한 지식은 아예 백지상태였다. 아는 거라고는 가발이나 연탄이나 똑같이 까맣다는 것 밖에 없었는데, 그조차 와서 보니가발은 까만색만 있는 게 아니라 각양각색이 다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전임 근무자도 대부분 회사를 떠난 상태라 업무를 일목요연하게 인계해 줄 사람이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처음 맡은 업무는 자재 관리. 가발 머리카락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재료는 어디서 구하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막막함이오죽했겠는가. 말 그대로 망망대해에 던져진 느낌이었다. 그래서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만든 것이 ‘가자회’였다.
당시 가발 회사로는 제일 규모가 컸던 서울통상(STC)부터 다나무역, 삼정물산, YH, 미방 등 동종 업계의 문을 두드려 자재과 사람들끼리 모임을 만든 것이다. 가발회사 자재과 모임이라 해서 이름을 ‘가자회’로 짓고 자재과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정보를 나눴는데, 내가 가장 아쉬운 입장이었으니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정보도 얻고 자재도 교환할 겸 가발 회사가 많이 자리했던 구로동을 부단히도 찾아다녔다. 그렇게 몇 년 간 가자회를 통해 많은 실무를 배웠다. 아마도 1970년대 가발 회사 자재과 사람들이라면 가자회를 기억할 것이다.

가발공장이 많았던 구로공단 ©금천구청
그렇게 내가 가발 정보를 얻으려 발로 뛰는 동안 회사도 여러 차례 변화를 거듭했다. 인수 초기에는 기술력이 없다 보니 당장 오더를 받기 힘들어서 상당 기간 자체 생산을 못하고 하청 작업으로 버텨 나갔다. 그런데 서울통상에서 기술을 담당했던 최용성 전무를 영입하면서 제대로 생산 체제를 갖춰 나가기 시작했다.
그때 미성은 미국보다는 일본을 상대로 제품을 생산하고 수출했는데, 여기에는 뚜렷한 장단점이 있었다. 우선 단점이라면 일본으로 수출하는 제품은 바이어가 상당히 까다롭기 때문에 마무리가 깔끔한 제품을 생산해야 한다는 점. 그래서 작업에 좀 더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야 했다. 반면 그 덕분에 제품의 품질을 상당히 높여주는 생산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는 건 큰 장점이다. 오랜 시간 미성 가발의 품질이 좋다고 평가받는 근간에는 초반부터 그런 단련 과정이있어서라고 본다.
이후 미성이 한 단계 더 도약하게 된 것은 본사에서 근무하던 이봉상 과장이 미성 가발 부서의 부장으로 오면서였다. 꼼꼼한 관리 능력에 대인관계도 좋았던 이봉상 부장은 미성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남다른 대인관계로 영업력을 강화하여 오더를 확보하고, 오더가 확보되니 생산 기반을 다져서 개발력을 증진하며 회사가 본래의 틀로 돌아가게끔 원동력을 마련했고, 능력을 인정받아 부장에서 상무로 전무에서 대표이사로 고속 승진을 했다. 이봉상 대표이사 아래서 홍수강 부장이 생산을, 전병직 실장이 개발을, 내가 관리부장을 맡고 있었는데, 또 하나 획기적인 것은 1년에 한 번씩 생산 관리자와 관리 책임자의 보직을 맞교대시켰다는 점이다. 관리만 맡고 있던 내게는 생산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산을 전담했던 홍수강 부장에게는 관리 능력을 키울 기회가주어졌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제도였는데 돌아보면 인재를 키우는 현명한 아이디어였다는 생각이 든다.
종업원을 관리하는 기발한 방식
그런데 직원이 아무리 관리 능력을 키운들, 바이어들에게 인정받는 제품을 만들어내는 건 생산직 종업원들의 손에서다. 숙련된 기술은 기본이요, 좋은 제품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하는데 이를 어떻게 심어줄 지가 고민이었다. 각자 바쁘게 돌아가는 공정 속에서 교육이랍시고 종업원들을 한 데 모아 얘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 무엇을 어떻게 전달해야 종업원들의 의욕을 북돋울 수 있을 것인가.
고심하던 우리는 공장 내부 1,2,3층에 스피커를 연결했다. 메인 부서가 있는 3층에서 마이크를 통해 훈시 내지는 방침을 설명하면 전체 인원이 경청하고,세부 사항은 부서장들이 챙기면서 자체적으로 관리하는 식이었다. 다행히 이 방법이 잘 먹혀 들어가면서 다 같이 품질 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종업원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능률을 높이는 필살기가 더해졌는데 바로 전병직 실장의 라이브 뮤직이었다.

가발공장 작업 모습 ©한국경제/콩나물 신문
가발 공정은 정모부터 쌍침, 세트, 캡, 고침, 수제, 완성에 이르기까지 적게는 7개, 많게는 9개 공정으로 나뉘는데 각 공정의 난이도가 제각기 다르다. 따라서 공정 간에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밸런스를 잘 맞춰서 생산하고 납기를 지키는 게 가발 공장에서는 무엇보다 중차대한 일이었다. 특히 완성반의 경우는앞서 다른 부서들이 정시에 끝났어도 마무리 작업을 해야 하니 매번 야간작업이 많았다. 그럴 때는 종업원들이 작업 중 졸리지 않도록 음악을 틀어주는데,가수의 노래보다 더 호응이 좋았던 게 직원이 직접 마이크를 들고 노래를 불러주는 이벤트였다.
그 어려운 일을 당시 개발실장이던 전병직 씨가 기꺼이 맡았다. 늦은 밤, 2층에서 한창 완성반 작업이 진행될 때 전 실장은 불 꺼진 3층 작업장에 혼자 올라가 직접 노래를 부르고 곡 신청도 받아서 음악다방 DJ노릇을 톡톡히 했다. “다음 들려드릴 곡은 세트반 김00 씨의 신청곡입니다. 남진의 ‘그대여 변치 마오~’” 이런 식이다. 우리는 지금도 만나면 그때를 회상하며 박장대소하곤 한다.
납기가 빠듯해서 심지어 야유회 가는 전날밤 철야 작업을 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 난감한 건 개인사정으로 빠져야 하는 종업원들이 있다는 점이었다. 저마다 사유는 비슷했다.
“할매가 몸이 불편하셔가 밥을 차려드려야 되거등예.“
“부모님이 일을 댕기셔서유, 지 아니믄 동생들 아침밥 챙길 사람이 없는디…”
기능자 인력이 빠져 버리면 작업에 차질이 생기니 직원들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해결에 나섰다. “그럼 반장은 필요한 도시락 수량 파악하고 운전기사 대기시켜 줘. 나는 당장 식당에 연락해 볼 테니!”
덩달아 구내식당까지 야간작업을 하고 종업원들이 일할 동안 직원들은 밤새워 해당 가정의 도시락을 배달했다. 요즘 유행하는 ‘새벽 배송’을 우리는 일찌감치 시도했던 셈이다.
집에 못 가는 날은 다반사였다. 저녁때쯤 되면 작업반장들이 ‘우리 과장님은 오늘 또 집에 못 가시겠구나’ 판단하고 눈치껏 사무실 책상 두세 개를 붙여 이불과 모포를 챙겨주었다. 가끔은 4층에 있는 종업원 기숙사 한 켠에 잠자리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옛모습 그대로인 미성상사 4층 건물(재개발 예정)
모두의 열정이 뜨거웠던 시절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너에게 묻는다’라는 안도현의 시(詩)다. 나에게 묻는다면 자신 있게 그 시절 뜨거웠노라고 답할 수 있겠다. 연탄회사에서 졸지에 가발회사로 옮겨와 기본부터 배우고 열정을 태우며 일했으니 말이다. 1970년대 한국 경제가 막 부흥하고 가발이 주력 수출품으로 꼽히던 시기, 나만 아니라 모두가 산업 역군이란자부심을 갖고 뜨겁게 일했다. 메이드 인 코리아의 명성이 나이 어린 여공들의 손에 힘입어 전 세계 곳곳에 알려진 것이다. 지금은 누군가의 어머니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그때의 종업원들에게 지면을 빌어 감사를 전한다.

좌) 가발공장 여공들 (출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그렇게 한 뜻으로 일했으니 노사협의란 게 따로 필요 없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미성상사가 노동부의 노사협의회 우수업체로 선정되어 선진사례를발표할 일이 생겼다. 그리고 발표 당일, 사장님에게 갑작스러운 일정이 생기면서 그 바통이 애꿎은 내게로 돌아왔다.
“오늘 강의, 김 차장이 대신해 줘야겠어.” 나는 그만 앞이 막막해졌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